한나라당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 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야당은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정 총리에 대한 ‘융단폭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야당은 정 총리가 여러 외부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정 소득을 챙긴 사실을 잇따라 폭로하면서 정 총리를 코너로 몰아세우고 있다. 의혹이 계속 터져 나오면서 ‘착오였다’ ‘몰랐다’는 정 총리의 해명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양파껍질처럼 의혹이 계속 불거져 나와 ‘의혹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정 총리의 지뢰밭 총리 행보를 들여다봤다.
“(인터넷서점 예스24를 제외하곤) 영리기업에서 형식적으로라도 자문이나 고문 역할을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까?”(민주당 최재성 의원)
“저는 그런 관계는 없습니다.”(정운찬 당시 총리 후보자)
지난 9월 22일 열린 정운찬 총리 후보자 인준 청문회에서 민주당 최재성 의원이 질의 막바지에 정 총리 후보자에게 물은 질문이다.
이 날 최 의원은 정 후보자가 서울대 교수 재직 시절인 2007년부터 1년 10개월 동안 인터넷 서적 업체 ‘예스 24’의 고문을 맡으면서 자문료 9583만 원을 수령한 사실은 국가공무원법상 ‘영리목적 겸직 금지’ 규정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 총리 측은 일련의 수당을 12차례에 걸쳐 나눠 받은 것에 불과하다며 최 의원의 주장을 반박했다. 하지만 정 총리의 이런 답변은 오히려 더 큰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정 총리의 ‘투잡’(Two Job) ‘쓰리잡’(Three Job)이 국정감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감사나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진 정 총리의 겸직 건수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모두 7개에 달한다. 정 총리는 청문회 과정에서 ‘예스 24’ 외에는 사외이사나 고문직을 맡은 바 없다고 답변했지만 무려 6건의 외부 활동 전력이 새롭게 드러난 셈이다. 이 중 몇 군데는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맡은 것으로 이는 국가공무원법 위반 논란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정 총리가 겸직해 온 외부활동을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 가장 먼저 한국신용평가(한신평)의 이사를 맡은 사실이 눈에 띈다.
최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정 총리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외국인 투자기업인 한국신용평가의 등기이사로 재직했다. 최 의원은 “한신평은 99년 급여성 비용만 40억 원에 달하는 회사로 정 총리는 이사 재임시 받은 보수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총리실 측은 “정 총리는 2년간 한신평 사외이사로 활동했으나 보수를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지분도 전혀 취득한 사실이 없다”면서 “회의가 있을 때 참석비 명목으로 소정의 회의비를 받은 게 전부”라고 해명했다. 총리실은 또 “당시는 영리법인의 사외이사를 맡기 위해선 소속 기관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교육공무원법 규정이 시행(2002년 12월)되기 이전의 일”이라며 “1998년 마련된 서울대 자체 지침에서도 비상장 법인의 사외이사는 허가 기준에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 총리는 비슷한 시기 예금보험공사의 자문 위원 역할도 맡았다. 정 총리는 자문위원으로 재직할 당시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몇 십만 원씩의 자문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정 총리는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외부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포스코, 대림, 쌍용 등 주로 대기업에서 운영했던 재단 및 연구소와 연을 맺었다.
정 총리는 쌍용그룹과 연관이 깊은 성곡학술재단의 등기이사를 2004년 8월부터 2008년 8월까지 4년간 맡았다. 1993년부터 올 2월까지는 대림건설에서 설립한 수암문화재단의 등기 이사도 역임했다. 두 재단은 모두 교육부 장관에게 허가를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법적인 하자는 없었다.
논란은 정 총리가 지난 2005년 새로 맡게 된 포스코 청암재단의 이사직을 교육부 장관의 허가없이 맡게 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거졌다. 2005년은 정 총리가 서울대 총장이었던 시기로 정 총리는 겸직 허가 신청 없이 대기업 사외이사를 맡은 것이다. 이에 대해 최 의원은 “2004년 성곡 학술 재단과 2005년 수암 문화재단 이사를 할 때는 교육부 장관의 허가를 받았음에도 청암재단 이사직에 대해서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라고 주장했다, 최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정 총리는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게다가 정 총리는 ‘총리로 내정됨과 동시에 모든 외부직에 대한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청문회에서 밝혔으나 청암재단 이사직은 정작 청문회가 시작되고서야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 총리는 서울대 총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러 기업의 고문으로 활동을 해왔다. 그는 2007년 12월부터 올 초까지 하나금융그룹연구소 고문을 맡아 1억 원 정도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최근에는 언론보도를 통해 정 총리의 외부 활동이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뤄졌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10월 14일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정 총리는 일본의 정보통신 분야 대기업인 CSK 그룹 연구기관인 지속성장연구소(CSK-IS) 사외이사로 지난 2007년부터 2년 동안 재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업 홍보실 관계자는 정 총리의 활동 내용에 대해 “2007년 6월 도쿄에서 개최한 ‘CSK-IS의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거나 몇 차례 기업 활동에 대해 어드바이스를 했다”고 말했으며 “회사 방침상 정확한 급여 등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겨레>는 보도했다.
정 총리는 이 회사의 사외이사를 맡을 때도 청암재단 때와 마찬가지로 교육부에 겸직 허가 신청을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총리실은 “지난 9월 사업이 종료된 이 연구소에서 연구 발표와 심포지엄 참여 등의 학술 활동을 하고 학술비를 지원받았다”며 “지원받은 연구비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밝힌 1억 원의 해외 강연료 수입에 포함돼 있으며 종합소득세도 납부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연구에 대한 고문 활동으로, 경영과 무관한 학술활동이기 때문에 겸직 허가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정 총리와 관련한 새로운 의혹들이 끊임없이 불거지면서 총리직 수행에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불거진 의혹보다 심각한 문제는 정 총리의 해명이 오락가락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정 총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고문직은 맡은 것이 없다” “‘수암’을 ‘청암’으로 착각했다”라는 식의 해명은 오히려 위증 논란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KSOI(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10월 14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7.5%는 ‘위증이 사실이라면 사퇴하는게 맞다’는 의견을, 27.1%는 ‘사안이 불거진 만큼 사과 또는 유감표명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즉 정 총리와 관련한 부정적인 여론이 무려 70%를 넘은 셈이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여의도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내년 4월 총리 교체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현 정권의 ‘히든카드’로 꼽히며 화려하게 총리에 오른 정운찬 총리. 현 정권 지지율 상승에 가속도를 올려줄 것만 같았던 그가 적절치 못했던 외부활동으로 인해 오히려 정권의 발목까지 잡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