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경찰에 따르면 교민사회에서 수년간 유능한 펀드매니저로 이름을 날리던 김 씨는 경영악화 및 투자실적 부진 등으로 원금회수가 어려워지자 치밀한 사기극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백 명의 교민들을 울리고 교민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이 남자의 지능적이고도 기막힌 사기행각 속으로 들어가보자.
국내의 한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김 씨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 것은 1999년. 밴쿠버에 정착해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딴 김 씨는 2002년 시민권을 취득한 후 S 투자운용회사를 설립했다.
펀드매니저로 활약하면서 김 씨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유능한 투자전문가이자 선물투자계의 기린아로 교민사회에서 명성을 날렸다. ‘젊고 실력 있는 펀드매니저가 있다’ ‘매달 고율의 이자를 챙겨준다’는 입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 씨는 교민들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투자상담을 해주고 많은 돈을 유치해왔다. 실제로 투자분야에 있어 상당한 실력이 있었던 데다가 돈 굴리는 수완이 뛰어났던 김 씨는 회사를 설립한 후부터 지난해 가을께까지 투자자들에게 원금의 30~40%에 달하는 이자를 꼬박꼬박 지급해왔다.
김 씨의 남다른 투자수완은 좁은 교민사회에 금세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부분의 은행들이 낮은 이자를 지급하고 있는 캐나다 현지 상황 때문인지 김 씨가 제시한 이자율에 대한 교민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에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자영업자와 치과의사 등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교민들도 앞다투어 김 씨를 찾았다.
날로 높아가는 명성에 자신감을 얻은 김 씨는 밴쿠버에 있는 한인교회 등을 중심으로 인맥을 넓혀갔고 “금과 미국채권 등에 투자해 연 30~40%의 이자를 돌려준다”는 말로 부유층 교민들을 현혹시켜 점점 많은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자귀재’로 유명세를 떨친 김 씨의 승승장구도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금융위기를 피해가진 못했다. 예상외로 운용실적이 저조해지자 김 씨는 급한 대로 일명 ‘돌려막기’로 일부 투자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해왔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장기화되면서 돌려막기는 한계에 부딪혔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겨우 괴는 편법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11월부터 회사경영마저 마비되었고 김 씨는 더욱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일부 투자자들에게 이자 지급은 고사하고 원금회수조차 사실상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자신이 운용하던 회사마저 자본잠식 상태에 들어가자 이미 회복불능 상태에 처했음을 직감한 김 씨는 교민들의 투자금을 떼어먹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김 씨는 지난 2월부터 사람들을 끌어모아 집중적으로 투자금을 유치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투자실력을 내세우면서 고리의 이자를 보장하는 등 자신감을 보였다. 7년 이상 약속대로 고이율의 이자를 지급하며 교민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아온 김 씨를 교민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특히 김 씨는 의심을 피하고 더욱 적극적인 투자유치를 위해 ‘투자금을 캐나다 정부가 보호해준다’는 내용의 공문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금융감독원에서 인증받은 것처럼 위조해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원금 손실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안함을 차단하기 위한 술수였다.
원금상환이 아예 불가능해진 5월경부터 김 씨는 더욱 적극적으로 투자유치에 열을 올렸다. 그는 교민 A 씨에게 “미국 채권에 투자하면 매달 고리의 이자를 주겠다”고 속여 29억 70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이런 방법으로 김 씨가 교민 200여 명으로부터 받은 금액은 무려 330억 원. 하지만 이는 캐나다 영사관에서 피해를 입은 시민권자들만을 상대로 조사한 피해 금액으로, 영주권을 가진 피해자들을 포함하면 김 씨가 착복한 금액은 700억 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는 게 경찰의 얘기다.
투자자들은 “10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원금과 이자를 같이 돌려주겠다”는 김 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실제로 김 씨는 투자자들의 독촉이 거세지자 급기야 단체 이메일까지 보내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강하게 항의하는 일부 투자자들에게 김 씨는 “하루빨리 원금을 돌려받으려면 내가 자유로워야 한다. 조금만 믿고 기다려달라”며 신고를 하지 말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월 4일 김 씨는 홀연히 사라졌다.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을 날을 기대하고 손꼽아 기다린 투자자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김 씨가 잠적한 사실이 알려지자 교민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투자자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김 씨는 물론 그의 가족들까지 이미 현지를 떠난 상황이었다. 피해자들은 적게는 수 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억 원을 김 씨에게 투자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들 중에는 이민 후 갖은 고생을 한 끝에 모은 전 재산을 맡긴 사람도 있었다.
경찰은 김 씨가 교민사회에서 수백억 원대의 사기행각을 벌인 뒤 국내에 입국했다는 첩보를 입수, 수사를 진행한 끝에 서울 명동에서 김 씨를 검거했다.
조사결과 김 씨는 원금상황 약속일을 앞둔 이달 초 가족들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먼저 이주시키고 자신은 투자금 상환을 약속한 4일, 한국으로 입국해 은신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투자자들로부터 가로챈 330억 원 중 150억여 원을 한국의 은행계좌로 송금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를 다시 인출하거나 다른 회사 계좌로 송금해 현재 통장에는 800만 원밖에 남겨두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는 나머지 돈의 행방이나 용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함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김 씨가 다수의 차명계좌로 분산시켜 은닉해뒀을 것으로 보고 계좌추적을 통해 돈의 행방을 쫓고 있다.
경찰은 현재 피해자들의 신고가 추가로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피해금액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캐나다 연방경찰과 공조수사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조수사가 진행된다고 해도 피해자들의 금전적 피해가 회복될 가능성은 낮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현재 교민사회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다. 특히 금전적인 피해에 더해 교민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며 심한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여 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믿었던 동포에게 날려버린 교민들의 충격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