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사들이 공사 입찰을 따내려고 벌이는 로비는 첩보전만큼이나 치밀하게 이뤄졌다. 사진은 교하신도시 입찰 비리에 연루된 금호건설이 입주해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전경. | ||
공사 입찰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교수의 양심선언과 폭로로 촉발된 건설업계 입찰비리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경기도 파주 교하신도시 공사 입찰비리 사건에 뇌물을 주고받은 건설업체 임직원과 공무원 등이 대거 적발됐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관급공사 수주 비리에 연루된 인사는 지금까지 모두 43명으로, 공무원과 기업 임직원은 물론 교수와 현역 군인까지 포함돼 있어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말 그대로 입찰에 힘을 쓸 수 있는 인물에 대한 다각적인 접촉과 로비가 이뤄진 셈이다. 첩보전을 방불케 한 교하신도시 입찰비리 사건을 들여다 봤다.
경기지방경찰청 제2청은 12월 7일 총 공사비 590억 원짜리 파주 교하신도시 복합커뮤니티센터 턴키 공사를 따내기 위해 공무원과 평가위원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혐의(뇌물공여 등)로 금호건설 A 상무를 비롯해 건설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파주시 공무원 B 씨, 평가위원인 환경관리공단 C 팀장과 LH공사(당시 대한주택공사) D 팀장 등 4명을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파주시청 공무원 B 씨는 지난 5월 말 금호건설 측에 평가위원 후보자 918명의 명단을 넘겨주는 대가로 3회에 걸쳐 8000만 원을 받았고 수차례 걸쳐 술접대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또 환경관리공단 C 팀장은 4만 달러, LH공사 D 팀장은 20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은 교하신도시 복합커뮤니티센터 입찰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서울 Y 대 이 아무개 교수가 지난달 4일 “금호건설 J 과장이 10만 원권 백화점 상품권 100장을 건넸다”고 폭로함에 따라 수면위로 드러나게 됐다. 그동안 암묵적으로 이어져온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로비관행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조사결과 금호건설 직원들은 지난 7월 17일 실시된 입찰을 앞두고 적격심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조직적으로 로비를 펼쳐온 것으로 드러났다. 놀라운 것은 해당 건설업체들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 유력 후보자들을 사전관리했을 뿐 아니라 갖가지 교묘한 수법을 동원해 전방위적인 로비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금호건설 등 해당 건설업체의 입찰 성공은 그야말로 치밀한 사전준비의 결과였다. 실제로 입찰과정에서 건설업체들이 보여준 로비수법은 수사관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한 치밀한 로비의 결과였을까. 금호건설은 지난 7월 열린 교하신도시 복합커뮤니티센터 A3 외 1개소 건립공사 설계심의에서 타 건설사들을 가뿐히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경찰조사 결과 드러난 금호건설의 로비과정을 살펴보면 파주시 공무원 매수→적격심사 평가위원 후보자 918명의 명단확보→학연·지연 등으로 분류해 특별관리→입찰당일 평가위원 명단 최종 확인→평가위원 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인물에게 신속한 연락→평가위원에게 금품제공 순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금호건설의 사전 물밑 작업은 입찰 한 달여 전부터 시작됐으며 작업에 필요한 이들을 순차적으로 섭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금호건설 측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정보파악을 위해 파주시청 담당 공무원을 매수하는 일이었다. 공무원을 매수, 이들로부터 평가위원 후보자 918명의 명단을 쉽게 입수한 금호 측은 이들 명단을 학연과 지연에 따라 분류한 뒤 적합한 담당직원을 지정해 특별관리해왔다.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파악해놓음으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확실한 승부수를 띄우기 위함이었다.
평가위원으로 선정된 이들과의 은밀한 접촉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선정 가능성이 높은 유력 후보자의 집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직원들은 상부의 연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들과 접촉, 준비한 금품을 건넸다.
평가위원으로 선정된 이들 중 일부는 금호건설 직원들이 건넨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금호 측은 평가위원들에게 건넨 금품은 현금과 미화, 상품권 등 수천만 원에 달했는데 평가위원들이 금호건설 직원들로부터 뇌물을 수수하는 과정은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했다. 빈손으로 현관을 나섰던 한 평가위원은 잠시 후 돈이 든 쇼핑백을 들고 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돈 액수를 유유히 확인하는 장면이 찍히는가 하면 또 다른 평가위원은 지하주차장에서 2000만 원을 받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입찰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건설업체는 금호건설뿐이 아니다. 금호건설 외 낙찰받은 동부건설 등 2개 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한 결과 경찰은 동부건설 A 과장의 컴퓨터에서 로비접대 현황이 담긴 파일을 발견했다. 또 이번 입찰과는 무관했지만 B 과장에게서는 여러 입찰에 대비해 평가위원 자격이 있는 교수와 LH공사, 조달청 등 공기업 직원과 군인 등 각 분야 전문가 25명에게 2~3년간 골프와 술 접대를 한 정황이 발견됐다.
경찰은 공사를 낙찰받기 위해 금품을 전달하거나 향응을 제공하도록 지휘하거나 지시한 혐의로 금호건설의 A 상무와 A 상무의 지시를 받고 돈을 전달한 직원, 또 돈을 받은 파주시 공무원과 평가위원 등 17명을 사법처리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처리결과를 두고 하급 담당 공무원과 건설업체의 담당자 등만 처벌되는 ‘꼬리 자르기’에 그쳤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정작 건설업체 간부에 대해서는 영장이 기각됐을 뿐 아니라 금호건설이 회사 차원에서 로비를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다. 로비에 이용된 자금은 대부분 수도권 현장 사무소장들이 조직적으로 본사로 보낸 활동비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됐지만 조직적인 로비는 A 상무 개인비리로 결론지어졌다. 상무 한 사람이 막대한 로비자금을 어떻게 조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남겨둔 채 일단락됐다. 로비에 투입된 거액의 출처에 책임을 져야할 ‘몸통’은 고스란히 법망을 피해간 셈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