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원 KB금융 회장 내정자가 지난 31일 이사회 간담회에서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사진은 이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취재진. | ||
강 행장 결심의 간접적 원인이 됐던 임시 주총 연기는 최근 금융당국이 KB 사외이사들의 비리의혹에 대해 고강도 조사를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는 강 행장이 KB금융지주 회장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이 이처럼 고강도 조사에 나서게 된 것은 KB 이사진과 강 행장이 현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금융감독원의 조사 이외에도 검찰에서는 강 행장을 직접 겨냥한 내사를 벌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강정원 사태’는 현 정부 들어 계속됐던 관치금융 논란에 기름을 부을 전망이다. 신년 벽두부터 금융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강정원 사태’ 속으로 들어가 봤다.
KB금융 이사회는 구랍 31일 간담회를 열고 오는 7일로 예정된 차기 회장 선임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연기하는 방안 등 각종 현안을 논의했다. 이사회는 지난해 12월 초 만장일치로 강정원 국민은행장을 차기 회장에 추대한 바 있고, 임시 주총은 강 행장을 차기 회장으로 공식 선임하는 자리였다. KB 내부는 물론 금융업계는 KB금융 이사회가 오래 전에 공시까지 한 임시 주총 일정을 급박하게 연기하자 그 배경에 대해 의아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특히 주총 일정 연기는 회장 선임 과정이 불공정했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회의 갑작스런 결정은 최근 금융감독원이 KB 사외이사들에 대한 고강도 조사를 벌인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금감원은 최근 KB금융에 대한 예비검사를 하면서 사외이사들의 비리 의혹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었다. 이번 검사는 오는 1월에 있는 국민은행과 금융지주의 종합검사에 대한 사전 검사 격이었다. 하지만 그 강도는 종합검사를 능가했다는 게 KB 측의 주장이다.
금감원은 이번 예비검사에서 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 주요 부서장의 컴퓨터 10여 대를 통째로 들고가 조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감원의 고강도 예비조사는 사실상 사외이사들을 향해 있었다. 금감원이 조사한 국민은행의 카자흐스탄 BCC(센터크레디트뱅크) 투자 건과 전산시스템 선정과정 특혜 의혹 등은 모두 사외이사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외이사들은 금융지주 회장 선출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번 조사가 결국 회장 선임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사외이사들을 향해 있다는 비판이 나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외이사들의 비리 의혹은 이미 KB금융지주 노조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해 온 것들인데 그동안 금감원은 이에 대해 ‘문제없다’는 입장을 보여 오다 이번에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뒤바꾼 배경에도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금융권에선 만약 강 행장이 사퇴하지 않았다면 정부 당국의 전방위 압박은 사외이사 선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 강정원 KB금융 회장 내정자 | ||
검찰에서는 강 행장이 국민은행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국민은행이 후원했던 골프대회와 관련해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대회의 홍보대행사를 맡았던 측과 강 행장이 특수 관계라는 소문이 사실인지도 알아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의 조사도 사외이사뿐만 아니라 강 행장을 직접 겨냥한 정황이있었다. 금감원은 예비조사를 실시하면서 강 행장의 차량기사까지 면담한 바 있다. 은행의 건전성을 따지는 금감원 검사에서 행장의 운전기사까지 면담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강 행장이 이처럼 여러 방면에서 고강도의 압박을 받는 이유는 뭘까. 금융권은 강 행장이 회장에 내정되는 과정에서 ‘괘씸죄’에 걸린 게 아니냐고 보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강 행장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수를 둬서 회장직에 내정됐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적’이 생겨났다. 게다가 강 행장은 그동안 회장 선출 일정을 연기하라는 금융당국의 수차례 요청을 모두 거부했다.
정부는 그동안 국내 최대 금융지주사인 KB금융지주의 사외이사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고 판단해왔다. 때문에 정부는 KB금융지주 회장을 뽑는 데 있어서 “일부 사외이사들이 폐쇄적으로 회장 선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특히 KB금융지주 탄생 이후 회장 선임과정에서 이런 부작용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이번 회장 선임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더욱 단호했다.
청와대와 금융당국은 이런 메시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강 행장에게 전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특히 그는 이사회에서 회장에 추대된 이후 “면접에 나가지 않는 것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나 몇 시간 뒤에 면접을 강행해 정부를 당황케 했다. 결국 강 전 행장과 사외이사들의 이런 행동들이 정부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정부의 고강도 압박 이면에는 청와대가 물밑 지원했던 인사가 이번 회장 선임 과정에서 낙마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이번 KB금융지주 회장 추천 후보위에서는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과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응모해 강 행장과 경합을 벌인 바 있다. 김 전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절친한 재무관료 출신이고, 이 사장 역시 현 정권 실세인 김백준 총무비서관의 매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회장 추천 과정을 문제 삼고 중도에 사퇴했다. 정부가 사외이사 제도에 대한 불만을 가질 만한 또 하나의 요인이 됐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우리은행 시절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이유로 사실상 금융계에서 퇴출되기도 했다.
증권거래소 이정환 전 이사장도 정부와 갈등을 빚다 결국 옷을 벗었다. 이 전 이사장은 정권 초 이사장 후보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임되는 과정에서 정권에서 의중에 뒀던 인사를 물리치고 선임됐었다.
당시 증권가에선 “관료 출신의 전 정권 인물이 새 정권이 낙점한 민간 출신 인사를 제치고 취임하자 고위층이 진노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추천위원회에서 이 전 이사장을 지지했던 사외이사들은 모두 교체됐다.
이 전 이사장 취임 직후에는 한국거래소가 방만 경영을 이유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증권거래소 내부에서는 이 전 이사장의 욕심 때문에 거래소 직원들이 검찰 수사까지 받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정부의 고강도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퇴임한 이 전 이사장은 고별사를 통해 “사퇴를 압박하기 위해 (금융정책 당국이) 좋아하는 선후배부터 증권 관련 단체와 사외이사, 직장 내부 인사들, 심지어 매일 접촉하는 부하 직원들까지 회유했다”고 주장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증권사들이 대주주인 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한 것은 자본시장의 역사를 20년 이상 거꾸로 후퇴시키는 반시장주의적 조치”라며 “정부가 개인을 쫓아내기 위해 제도와 원칙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한 것이 결국 이 전 이사장을 퇴진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 전 이사장에 이어 강 행장마저 낙마해 ‘관치’ 논란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강 행장이나 이 전 이사장의 경우와 같이 정부가 ‘괘씸죄’에 대해 보복성 대응을 이어가고, 민간회사까지 자기 입맛에 맞는 인사로 채우려 한다면 개별 기업의 자율성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비판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