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여배우들> | ||
노처녀의 중년 남자 판타지. 얼마 전 뮤지컬 배우 남경읍, 남경주 형제의 인터뷰 사진을 찍고 왔다는 포토그래퍼 A가 말했다. “선배, 남경주 씨도 섹시하지만, 난 남경읍 씨에게 완전히 반했어요. 일단 목소리가 너무 섹시하고, 말은 많지 않은데 존재감이 묵직한 게…, 중년 남자의 매력이랄까. 암튼,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촬영하고 싶어요”라고 말이다. A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여자 네 명은 ‘중년 남자 판타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중년 남자의 매력? 알지, 알지. 젊은 남자가 갖지 않은 노련함이 있잖아. 젊은 남자가 해마다 나오는 신선한 와인 보졸레 누보 같다면 중년 남자는 맛있게 숙성된 와인 같잖아. 경제력이 있으니 여유도 있고. 애송이 젊은 남자보다 훨씬 매력적이지.” “그 희끗희끗한 머리도 섹시하지 않아? 난 염색한 남자보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남자가 더 매력적이더라.”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예전에는 어린 남자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젊은 남자보다 중년 남자가 섹시해 보여. 농익은 맛이 있다고 할까. 내가 발목만 드러내도 섹스 신호인지 알아채는 건 역시 나이 든 남자거든. 그런 남자는 섹스를 할 때도 많은 주문을 할 필요가 없어. 다 알아서 해주니까.” “난 졸업 후에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와, 그가 선생님이 아니라 남자로 보이더라.” “중년 남자는 대놓고 들이대지 않더라. 밥을 먹을 때에는 그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어. 아니, 와인을 마실 때만 해도 몰랐지. 그런데 술이 적당히 들어가니까 슬쩍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거야. 그것도 조심스럽게. 아마 나를 간봤던 거겠지. 내가 당황하면서 허벅지에서 손을 쳐냈으면 그는 그대로 집에 돌아갔을 거야.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그가 3차를 가자고 하더라고. 그의 차에 올라타고 자연스럽게 호텔로 간 거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서 편하게 느껴지더라구.”
이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나 역시 중년 남자에게 성욕을 느낀 적도, 중년 남자에게 유혹을 당한 적도 있었다.
젊은 남자는 탄탄한 가슴 근육과 하룻밤에 세 번 이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체력이 무기라면, 중년 남자는 문화적 취향이 큰 무기가 된다. 연예인과 친하기로 유명한 포토그래퍼 B와의 촬영이었다. 워낙 기인으로 알려진 B는 스튜디오에 뮤직 플레이 시설이 잘 갖추어진 바가 있었고, 멋스러운 빈티지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 그 공간에 들어가니 B의 문화적 취향이 엿보였고, 그가 근사한 남자라는 것을 눈치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B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시작으로 라흐마니노프, 쇼팽 등의 클래식을 들려주었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만 보였더라면, 나는 B를 그저 ‘참 부자네’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그가 조관우의 ‘늪’ 그리고 심수봉의 ‘미워요’ ‘그때 그 사람’을 들려주었던 것. 그때부터 심수봉의 노래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저 흘러간 옛 트로트가 아니라, 클래식한 옛 노래처럼 생각이 되었던 것.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며 그는 프랑스 문학에 대해 얘기했고, 나는 ‘이런 남자가 프러포즈한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한 번 잘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나처럼 지적이고 다정한 중년 남자에게 약한 여자도, 막상 중년 남자에게 섹스 신호가 오면 움찔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스승 같은 존재였던 C를 먼저 유혹한 것은 나였다. 10년 전에는 스승과 제자 비슷한 사이였으나, 어느 날 그를 다시 만났을 때 C가 남자처럼 보였기 때문. 나는 C에게 종종 전화를 하면서 사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서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C가 새벽 2시 30분에 전화를 했다. 그때 나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스승이 옛날 제자에게 새벽 2시 30분에 전화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중년 남자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아직 스승을 받아들일 준비는 돼있지 않았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물론 그도 나에게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20대에는 30대 중반의 남자는 ‘아저씨’라고 생각하지만 20대 후반이 되면 40대 이상의 중년 남자의 매력도 알게 된다. 여자를 밝히고 음담패설을 즐기는 중년 남자는 질색하지만, 그 남자가 지적인 이미지에 유머를 갖추었고 둘만의 자리에서도 점잖은 남자라면 여자는 은근히 성욕을 느끼게 되는 것.
그녀를 유혹하고 싶다면 그녀가 당신의 바운더리에 들어와서 “오늘 집에 못 들어가겠어요”라고 말할 때까지 문화적 취향과 세상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유를 어필하라.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중년 남자가 가진 미덕일 것이다.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