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란치 종신명예위원장(위)과 1994년 IOC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난 집행위원들. | ||
사마란치는 30년 이상 함께 지내온 지인이다. 나이는 나보다 11세나 많지만 서로 형제(brother)라고 부르는 사이다. 내가 사마란치를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로마 NOC 총회에 김택수 KOC 위원장과 둘이서 참석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로드 킬라닌 IOC 위원장(아일랜드) 밑에서 IOC 의전장을 맡고 있었다.
사마란치와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1981년 4월 스위스 로잔의 팔레스호텔에서 있은 IOC 집행위윈회 및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연석회의에서였다.
이때 사마란치는 IOC 위원장에 선출된 후 처음 회의를 주재하며 어떤 스타일의 리더인지 테스트를 받는 입장이었고, 나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이 바로 전 해인 1980년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IOC 인정종목으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준회원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이때 국제경기단체 수장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그때만 해도 GAISF의 켈러 회장과 팔머 사무총장(유도회장)의 발언권이 강할 때였다. 당시 사마란치 밑에 IOC 부위원장에는 일본의 기요카와가 있었고, IOC 집행위원으로는 소련의 스미르노프(프로그램 위원장), 헝가리의 차나디 등이 있었다.
1981년 IOC 집행위원회는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그해 9월(IOC 총회)에 있을 1988년 올림픽 유치 결정에 앞서 예비심사를 받는 성격을 띠고 있어 더욱 중요했다.
기요카와 부위원장이 버티고 있는 나고야는 GAISF 집행위원회가 일본과 가까운 켈러 회장의 주도로 열리고, 또 도쿄올림픽의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훌륭한 유치보고를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일본 쪽이었다. 당시 서울은 유치 의사만 밝혀놓은 상태로 정부의 확실한 방침이 서지 않아 엉거주춤할 때였기에 대표단 자체를 보내지 않았다. 회의 도중 일본에 우호적인 켈러 GAISF 회장이 “나고야는 와서 보고를 하는데 서울은 KOC에 텔렉스로 초청을 보냈는데 회신도 없다”고 공격했다. 서울은 유치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니 유치후보에서 제외할 것을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건의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마란치 위원장이 나섰다. “내 정보로는 서울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유치단이 못 온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치도시가 하나만 있는 것보다 2개가 있는 것이 낫다. 그냥 둬라”고 결정을 내렸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사마란치의 판단과 결정이 없었다면 서울올림픽은 역사에 없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역사는 늘 작은 차이로 달라진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신출내기였고, 또 서울올림픽유치위원회는 구성도 되기 전이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GAISF의 팔머 사무총장을 앞세워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가서 다짐을 받아냈다. 서울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사마란치는 “걱정 말고 귀국하거든 준비나 잘하라”는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6월이 되어 유치준비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이규호 문교부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조상호 KOC 위원장, 필자, 정주영 현대 회장, 김택수 위원, 이원홍 KBS 사장 등이 매일 롯데호텔에서 만나 회의를 열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의 IOC 총회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88올림픽 개최지를 ‘세울(Seoul)’이라고 발표하는 것이 가능했다. 온 국민이 열광하고 또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이 장면의 이면에는 사실 서울이 후보도시에서 탈락했을 뻔한 위기도 있었던 것이다.
사마란치와 나의 친분은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형제처럼 두터워졌다. 참고로 1985년 당시 박종규 IOC 위원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그 자리에 뜻을 둔 인사들의 물밑 신경전이 정말 대단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낙점을 받으려고 다들 안간힘을 썼고, 당시 핵심 실세인 K 씨가 인선에 나섰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실제로 전두환 대통령이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 전 대통령은 다른 사람을 의중에 두고 있었고, 사마란치는 필자를 거론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또 이영호 체육장관이 일부러 로잔까지 가서 호텔로 사마란치 위원장을 찾아가 IOC 위원 후임을 논의하고 싶다고 눈치를 봤다. 그때도 사마란치는 “그 문제는 IOC에 달려있다”고 일축했다. 1986년 4월 사마란치가 서울에 왔을 때 한국정부에 “IOC 위원 없이 올림픽을 치러보라”는 초 강경자세를 보였고, 이에 어쩔 수 없이 전두환 대통령도 동의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전 대통령이 일단 결정이 난 후에는 내가 올림픽준비에 전념하도록 시원하게 지원해줬다는 사실이다.
▲ 1986년 3월 26일 NBC 등 방송사들과 서울올림픽방영권 협상을 끝내고 서명하는 모습(위). 1988년 남북 체육교류를 위한 4당대표 모임. 왼쪽부터 박세직, 윤길중, DJ, 사마란치, YS, JP, 필자. | ||
먼저 사마란치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 LA올림픽이 동서로 갈라진 지구촌 정세로 인해 반쪽짜리로 열리는 바람에 위기를 맞았다. 76년 몬트리올 때 아프리카 36개국의 보이콧을 포함하면 평화와 화합의 상징인 올림픽의 존립근거가 무너질 판이었다. 이에 자신이 IOC 위원장이 돼 처음으로 결정한 88서울올림픽은 훌륭하게 치러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서울올림픽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기장 시설, 경기운영 경험, 경기운영요원 양성, TV방영권, 마케팅, 남북문제, 소련 등 동구권의 서울기피 움직임, 한국의 경제력 등 사마란치는 고심이 많았다.
가장 큰 시련은 24개 종목 스케줄 편성에서 처음 터졌다. 24개 종목의 경기 스케줄은 올림픽 경기운영뿐 아니라 최대수입원인 TV방영권 교섭과도 직결돼 있는 중대사다. 따라서 일일이 육상, 수영을 비롯한 각 종목 국제연맹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조상호 사무총장이 일방적으로 작성, 발표한 것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말았다. 당연히 IOC와 각 국제연맹, 특히 네비올로 육상 회장과 충돌이 생겼다. 네비올로 회장이 승인을 안 하면 경기 스케줄 자체를 확정할 수 없고, 이 여파로 TV방영권도 교섭이 불가능해 올림픽 자체가 흔들릴 판이었다. 육상을 비롯해 24개 국제연맹이 분개하여 공격을 퍼붓자 사마란치는 국제연맹들과의 스케줄 협의를 내게 맡겼다. 한국의 유일한 국제경기단체 회장이고 GAISF의 집행위원이니 국제스포츠무대의 생리를 잘 알아 국제연맹들과 대화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일 큰 문제는 황금시간대에 육상 100m, 200m 결승시간을 뉴욕의 프라임타임(밤 8~12시)에 맞추는 것이었다. 한국은 오후 시간대를 생각하는데 그러면 뉴욕은 새벽이니 시청률이 망가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미국에 맞추자니 한국은 오전이 되고 말았다. 정부와 협의해 그해 서머타임을 만들어 한 시간 여유를 가졌지만 그래도 낮 12시에서 2시 사이에 결승을 해야 했다. 우선 사마란치와 협의해 측면지원을 받으며 미국 아이오와주로 가 세계수영연맹 헬믹 회장을 만나 수영부터 결승 시간대를 합의했다. 그리고 육상의 네비올로 회장과 끈질기게 협의해 아테네에서 열린 육상회의 기간 중 겨우 합의점을 찾았다. 육상, 수영이 끝나니 경기 스케줄 문제는 농구부터 시작해 쉽게 다 풀렸다. 이렇게 미국 뉴욕의 프라임타임에 결승시간을 맞춘 후 TV교섭을 할 수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서울올림픽의 최대 재원인 TV방영권은 전부 4억 1000만 달러로 결정났다. 제일 먼저 협상을 벌인 곳이 미국 NBC였다. 잇단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곤욕을 치른 NBC는 무척 까다롭게 조건을 내걸었고 3억 달러에 합의한 후에도 외환은행 보증을 요구하고, 10개 스포츠 강대국(거의 동구권)이 참가하지 않으면 자동감액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마란치는 만일 전쟁이 난다면 보증이 문제가 아니고 올림픽 게임 자체가 없어지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며 해주어도 되니 빨리 끝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미국 NBC의 모체인 RCA의 맞보증을 받아 한국의 체면을 세웠고, 일본을 비롯한 다른 지역 방영권 교섭을 하나하나 마쳤다.
다음 문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중국의 참가를 이끄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사마란치도 전념했다. 사마란치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체육장관 회의 등에 쉴 새 없이 돌아다녔고 남북체육회담도 로잔에서 자신의 주재로 4번이나 개최했다. 나도 사마란치의 지원 속에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각국을 수없이 방문했다. 이런 노력이 소련 등 동구권 국가에게 88올림픽 참가의 명분을 준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4번째 남북회담이 스위스 로잔에서 있을 때 사마란치가 따로 부르더니 “내일 8개 종목을 (북한에) 주는 척해라, 더 주어도 못 받을 것이다”라고 주문했다. 그러더니 새벽에 다시 불러 “4개 종목에 남녀를 나눠서 6개만 제안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다시 수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신경을 많이 쓴 것이다. 결국 회담은 명분만 얻고 끝났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은 전부 참가했다.
서울올림픽이 가까워지면서 또 남북회담이 열리면서, 남북공동개최 주장, 올림픽 반대운동 등이 심해졌다. 사마란치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당시 야당총재, 윤길중 민정당 대표를 직접 찾아 남북문제, 올림픽의 중요성 등을 설명하고 지지를 요청했다. 거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서울올림픽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사상 최대의 평화제전으로 끝났다. 사마란치는 올림픽 직후 출국하면서 이 조그마한 나라가 이런 큰 성공을 거둔 데 놀랐다고 했다. 그 후 몇 개월 후에 다시 한국에 오더니 “모두 교육의 힘인 것 같다. 이대로 가면 세계 열 번째 이내의 나라는 되겠다”라고 의미 있는 평가를 전하기도 했다.
사마란치는 수고한 사람의 공을 잊지 않는다. 서울올림픽 직후 노태우 대통령, 박세직 위원장에게 올림픽훈장 금장을 수여했다. 또 공적 있는 사람을 나에게 추천하라고 해서 조상호, 김종하, 김옥진, 최원석, 이건희 등을 올려 올림픽 은장을 받게 했다. 나중에 정주영 회장은 아무 상훈이 없었다는 말을 듣고 사마란치에게 급히 건의해 나가노 올림픽 때 고스퍼 IOC 위원 등, 일본거류민단 대표 등이 보는 가운데 올림픽 훈장을 수여하고 정몽구, 정몽헌 등 정주영 회장 일행을 위해 공식 축하 오찬을 베풀기도 했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