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이 국가보훈처 등 5개 기관을 대상으로 공상공무원 등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5113명 중 3074명에 대해 감사를 벌인 결과, 이 가운데 993명이 부적절하게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는 전체 감사대상의 32%에 이르는 수치다.
특히 가짜 국가유공자들은 업무와 관련 없는 일을 하거나 본인 과실로 상해를 입었음에도 마치 공무 중에 다친 것처럼 허위로 서류를 작성하는 등 공무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보훈처법에 따르면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면 학자금, 의료비 등의 지원 외에도 아파트 분양 시 우선순위 부여, 차량구입 시 세금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국민의 혈세로 지원되는 것이기 때문에 공무원들의 이런 도덕적 해이는 곧바로 세금 낭비로 이어지게 된다.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국가유공자가 된 공무원들의 ‘국가유공자 되기 백태’를 들여다봤다.
감사원이 적발한 내용에 따르면 국가유공자가 되는 편법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가장 흔한 것이 업무와 관련 없는 일을 하다 다쳤음에도 마치 업무 중에 상해를 입은 것으로 서류를 조작하는 것이다.
광주광역시 남구의 7급 공무원 A 씨는 지난 2003년 4월 배드민턴 동호회 친선경기를 한 뒤 휴식 도중 쓰러졌다.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은 고혈압 상태에서 음주와 흡연을 한 본인의 과실로 판정해 공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국가보훈처는 2005년 5월 A 씨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7급 공무원 B 씨는 2006년 산불감시 대기 근무를 하던 중 무료함을 달래려고 공동묘지 일대에서 동료들과 축구하다 무릎 부상을 입었다. 업무 중 공상으로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B 씨를 국가유공자로 등록했다.
이외에도 △당직근무 중 담배를 피우기 위해 슬리퍼를 신고 본관 현관문을 발로 밀치다 부상을 입은 경우 △테니스 코트 옆을 지나가다 날아오는 테니스 공을 잡으려다 착지를 잘못해 좌측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은 경우 △테니스 연습경기를 하던 중 몸의 균형을 잃고 테니스 라켓으로 자신의 좌측 대퇴부를 때려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은 경우 등 업무와 전혀 상관없이 상해를 입어도 국가유공자로 등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본인 과실로 상해를 입었음에도 국가유공자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1997년 1월 서울에 출장을 간 전라남도 보성군의 6급 공무원 C 씨는 지인의 상가에서 술에 취한 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16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다 차에 치였다. 본인 과실이었지만 국가보훈처는 2006년 6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 C 씨의 공무상 요양급여를 승인했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유공자로 등록했다.
경북도청 6급 공무원 D 씨는 지난 2004년 부서 공식 회식을 마친 뒤 일부 동료와 따로 ‘2차’를 가서 술을 마시다 다쳤지만 이를 회식 후 남은 업무를 처리하려고 사무실로 돌아오다 넘어져 다친 것으로 꾸며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D 씨는 공무상 요양비 497만 원, 퇴직 후 매월 장해연금 63만 원을 받아 온 것은 물론 자녀교육비 800만 원 등의 보훈 혜택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뇌물수수나 뺑소니 등 각종 불법행위를 저질러 놓고도 버젓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서울시 용산구청 소속 E 국장의 경우 뇌물수수 등 범죄행위로 지난 2007년 5월 퇴직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역 중에 급성 심근경색(2000년 4월 배구경기 관람 도중 발병)으로 국가유공자에 등록돼 공무상 요양비 338만 원과 매달 148만 원의 장해급여를 그대로 받아 챙겨왔다.
앞서 사례에서 보듯이 공무원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본인의 탁월한 시나리오 작성 능력이 절대적이다. D 씨의 경우 유공자 판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공자 판정을 받기 위해 서류를 치밀하게 조작했다. 그는 부하직원을 시켜 당시 저녁식사가 공식적인 회식자리인 것처럼 꾸몄다. 이에 부하직원은 직원송별회 명목으로 회식을 벌이다 사고가 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송별회 선물비용 영수증 등을 가짜로 작성해 붙이는 꼼꼼함을 보였다.
이처럼 허위 국가유공자 등록을 위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소속기관 상급자의 협력이다. 공무원이 상해를 입게 되면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 해당 공무원의 소속기관에 사실 확인을 한 뒤 공무 중에 발생한 것인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보훈심사위원회는 이를 바탕으로 국가유공자에 해당하는지를 심사하게 된다.
소속기관장 등이 최초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보훈심사위원회 등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기관장 등은 같은 공무원 입장에서 부하직원들의 불행을 모른 척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허위 서류 작성을 눈감아 준다.
결국 공무원들 간의 ‘자기식구 감싸기’로 인해 국민들의 혈세만 줄줄 새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엉터리 보훈 심사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07년에는 국가유공자 업무를 관할하는 보훈처 차장이 허리 디스크를 공무 중 생긴 것처럼 가짜 서류를 만들어 대학생 두 자녀의 학자금 전액을 지원받은 것이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국가 유공자로 등록된 보훈처 소속 공무원 92명을 특별 감사해보니 29명이 각종 속임수로 유공자가 된 사실이 밝혀졌었다.
보훈처는 외부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심사 인력을 늘리고 서류 심사 대신 현장 조사를 우선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엉터리 국가 유공자가 전체 유공자 중 3분의 1이 되는 지금의 현실을 막지는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외부 전문가들을 크게 늘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유공자 심사는 전·현직 4급 이상 공무원인 상임위원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은 “전체 유공자 중 155명(3%)만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다 다친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감사원은 “소속기관장이나 보훈처 등이 온정주의에 치우쳐 해당 공무원이 공무 중에 다친 것으로 묵인해 주면 이를 걸러 줄 장치가 없다”며 “앞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다 세밀한 검증시스템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