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속 게임 이미지들은 기사와 관련 없음. | ||
인터넷 보급이 확산되고 프로게이머가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인터넷 게임에 열광하는 이들이 늘었다. 게임에 중독되어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들이 사이버 공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륜에 목숨까지 건 ‘살인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는 심각한 게임중독 실태를 들여다 봤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등장했다. 이는 ‘어떤 장소에 틀어박히다’란 뜻으로 6개월 이상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거부하고, 방이나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지내는 사람을 지칭한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공개한 2008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도 ‘은둔형 외톨이’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난 2월 16일 숨진 손 아무개 씨(32) 역시 ‘은둔형 외톨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손 씨는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12일부터 닷새 동안 식사도 잠도 거르고 게임에만 몰두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PC방을 15시간 이용할 수 있는 정액권을 매일 끊어 온라인 무협 게임을 즐겼다. 사고 당일 게임을 하던 중 화장실에 간 손 씨는 갑자기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2시간 40분 만에 숨졌다. 손 씨처럼 게임에 몰두하다 갑자기 숨진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2006년 대구의 한 PC방에서는 약 50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게임에 열중하던 이 아무개 씨(50)가 갑자기 쓰러져 숨졌으며, 20대 김 아무개 씨는 장시간 게임으로 목이 70도 틀어져 아픔을 호소하기도 했다.
인터넷 사용 때문에 중요한 사회적, 직업적 활동이 포기되는 상태가 12개월 동안 발생할 때 ‘인터넷 중독 장애(internet addiction support group)’로 분류한다. 인터넷에 중독된 이들은 사이버 공간이 자신의 마음과 인격의 연장이란 느낌을 갖게 된다.
서울에 사는 주부 최 아무개 씨(40)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직접 음악방송을 시작했다. 음악방송을 하면서 가까워진 사람들과 오프라인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말 잘 통하는 한 남자와 사이버 결혼을 한 후 “사이버 남편이 조금이라도 컴퓨터에서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에 휩싸여 다른 일을 제치고 컴퓨터에만 몰두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사회와 격리된 삶을 살던 ‘은둔형 외톨이’들은 인터넷 게임 공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람을 살해하기도 한다. 지난 2월 7일 인터넷 게임만 한다고 꾸짖은 친모를 살해한 오 아무개 씨(22) 역시 게임 중독 증세가 심각했다. 오 씨는 인터넷 게임에 빠져 지낸다고 나무라는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한 뒤 안방에서 낮잠을 자던 어머니를 둔기로 수차례 내리쳐 숨지게 했다.
어머니를 살해한 뒤 오 씨는 시신이 있는 안방 문을 잠근 뒤 샤워를 하고 거실에서 4시간 동안 태연하게 TV를 시청했다. 이후 어머니의 신용카드를 들고 나와 의정부 시내 PC방에서 게임을 계속 한 것으로 드러나 ‘패륜’의 극치를 보여줬다. 오 씨는 2월 14일 낮 설을 맞아 찾아 온 형의 신고로 16일 경찰에 검거됐고,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2월 18일 기자와 통화한 양주경찰서 수사과장은 “오 씨는 우발적으로 친모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며 “범행 자체가 워낙 쇼킹해 시간을 두고 오 씨의 진술을 확보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오 씨의 살인사건은 지난 2007년 부산에서 발생한 ‘할머니 엽기 살인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2007년 5월 25일 부산에서 발생한 60대 할머니 토막 살인사건은 7년간 할머니와 함께 생활해 온 중학생 손자가 범인으로 드러나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둔기로 홧김에 범행을 저지른 손자는 시신절단과 유기 방법 등을 인터넷 야쿠자 게임을 통해 학습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시신 옆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이틀 동안 생활하다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토막 내는 등 어린 학생의 소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잔인성을 드러냈다.
게임 중독의 충동성과 폭력성이 발단이 돼 벌어진 참극은 이뿐만 아니다. 2001년 3월 광주에 사는 중학생 김 아무개 군은 즐겨하던 인터넷 게임을 흉내내 남동생을 살해했고, 2008년 용인의 한 초등학생은 평소 즐기던 자동차 게임을 모방해 훔친 승용차를 몰다 사고를 내기도 했다. 2005년 5월 경기도의 조 아무개 씨는 온라인 게임 운영진에게 강제 퇴출을 당한 후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이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분당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김상은 교수 팀은 인터넷 과다 사용자가 마약 중독자와 유사한 뇌신경학적 메커니즘이 있음을 규명했다. 양전자방출단층촬영 기법을 이용해 관찰한 결과 인터넷 게임 과다 사용자가 정상 사용자보다 높은 대뇌 활동성과 충동성을 보였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되면 도파민 저기능 상태가 지속돼 강력한 자극을 찾아 헤매게 된다고 연구팀은 주장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1월 27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터넷 중독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양부모 가정 자녀의 인터넷 중독률은 13.4%인 반면 한부모 가정 자녀는 22.3%로 높은 중독률을 보였고, 인터넷 중독 고위험 청소년 중 56.3%는 맞벌이 가정 출신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성인 무직자의 인터넷 중독률은 9.6%로 평균 성인(6.3%)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게임 중독 증세를 보이는 자녀에 대한 가족의 따뜻한 애정과 장기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 게임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선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 2월 18일 기자와 통화한 한국정보화진흥원 인터넷중독예방상담 고영삼 센터장은 “인터넷 게임 중독 증세가 나타날 경우 상담을 통해 조기에 치료할 것을 권한다”면서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는 전국에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밤 2시까지 전화, 화상채팅 또는 직접 대면을 통해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