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상을 주먹세계에 몸담으면서 김두한의 후계자로 잘 알려진 천안곰 조일환 씨는 생전에 ‘변화하는 조폭계의 판도’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중들에게 이름을 날렸던 스타급 보스들의 동향에 수사기관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변화하는 조직의 판도로 볼 때 그들은 더 이상 ‘보스’로서 힘이 없다. 남아있는 일부 조직원들이 옛 보스의 명성을 이어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막대한 자금을 갖고 세를 확장하는 신흥 조직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게 조 씨의 얘기였다.
특히 얼마 전 국내최대폭력조직 칠성파의 보스 이강환 씨가 검거됨에 따라 조폭계의 판도에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큰 형님들과 스타급 보스들이 떠난 조폭세계 판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보스급 인사들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수사기관이 파악하고 있는 전국의 폭력조직은 모두 223개파로 산하 조직원들은 5450명 정도다. 이는 검찰 측이 관리하고 있는 인원보다는 훨씬 적다. 2007년 법무부 형사기획과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전국의 조직은 무려 471개파로 조직원 수는 1만 1476명에 달했다. 경찰청은 “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계파나 조직원 수는 누적된 것으로 경찰이 주시하고 있는 실제 조직 및 활동하고 있는 주요 조직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부산엔 전국 최대 계파인 칠성파를 포함한 23개파에 385명의 조직원이 활동하고 있다. 주요 도시별로 정리해보면 전주월드컵파가 포함된 전북지역에는 15개파(486명), 무등산파로 대표되는 전남에는 6개파(185명), 수원남문파가 있는 경기도에는 30개파(924명), 동성로파의 활동무대인 대구에는 11개파(313명)가 활동 중이다. 서울 지역에는 고흥식구파, 이글스파, 상택이파로 각각 활동하던 이들이 뭉쳐 2007년 결성된 연합 고흥 식구파를 비롯한 23개파에 507명의 조직원이 활동하고 있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보스나 간부급 조직원의 동향에 따라 조폭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해마다 판도가 계속 바뀌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최근의 조폭집단이 과거와 다른 점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타급 보스가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조양은 김태촌급의 인물은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세간에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다른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상대 조직과 피 튀는 전면전을 하기보다는 유흥업소와 관광시설, 도박장, 시행사 및 건설업 등의 자체사업을 통해 자금력을 키우고 이를 토대로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전직 보스들 밑에 있던 중간급 간부들 중 상당수가 개별 조직을 꾸려 독립하거나 사업가로 변신했다. “잘나가는 보스들은 겉으로 합법적인 사업을 표방하는데 엄청난 현금 동원력으로 인해 ‘사업계의 큰손’ 혹은 ‘기린아’ 대우를 받는다. 요즘 갈취나 폭행 등 자잘한 사건으로 뉴스에 등장하는 이들은 말만 조폭일 뿐 대개 이름도 알 수 없는 신흥조직의 속칭 ‘똘마니’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 검거 이틀 만에 풀려난 칠성파 보스 이강환. 연합뉴스 | ||
현재 수사기관 관계자들에게 최대의 화두는 이강환의 몰락 여부 및 칠성파의 행보다. 국내 최대조직의 보스가 검거되자 경찰은 조폭계의 판도변화를 주시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현재 부산내 폭력조직은 23개파 385명으로 칠성파 외에도 신20세기파, 유태파, 영도파, 연산통합파, 신사상통합파 등의 조직이 주요 감시대상에 올라있다.
이 중 칠성파는 이강환의 네임밸류를 업고 부산 암흑가를 장악해왔다. 이 씨의 손윗동서가 1957년 조직한 칠성파는 부산을 기점으로 전국 최대의 조직으로 세를 확장해왔는데 현재도 부산지역 유흥가의 80%를 장악하고 있을 만큼 막강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조직을 물려받은 이 씨는 지난 1991년 검찰의 ‘조직폭력과의 전쟁’ 선포 이후 구속돼 8년간 복역했다. 또 2000년에는 부산 모 나이트클럽 지분 다툼으로 검찰에 구속돼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2003년 출소 후 이 씨는 공식적으로는 은퇴를 선언했지만 엄청난 자금력과 막강한 정보력을 이용해 지역내에서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출소 후 이 씨가 2억 원짜리 벤츠를 수표가 아닌 만원권 현금으로 구입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일흔을 앞둔 백발의 노인에게 경찰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씨의 영향력은 2007년 4월 부산 서면롯데호텔에서 열린 이 씨 아들의 결혼식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이날 500명 이상의 조직원들이 몰려들어 경찰이 비상에 돌입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 칠성파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씨는 당뇨병 등으로 인해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퇴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며 조직을 지배해온 그지만 칠성파는 보스의 수감을 계기로 이미 수차례 내부 분란을 거듭한 바 있고, 조직이 사분오열돼 조직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히 칠성파의 이번 악재를 노린 반 칠성파조직들이 합세해 반격을 가하거나 지분을 놓고 혈투를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여기에 ‘포스트 이강환’ 자리를 놓고 내부 분란이 일어날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씨의 신망을 받아왔던 보스급들을 중심으로 서열정리에 들어가고 칠성파가 새롭게 조직을 정비·쇄신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씨가 오랫동안 자신에 대한 충성을 보여온 핵심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지파구도로 조직을 끌어온 만큼 구심점과 결속력이 약한 여타 조직에 의해 와해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다. 경찰이 현재 이 씨의 여죄를 캐기 위해 행동대장 등 간부급 조직원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조사를 진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씨는 현재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데다가 검거 이틀 만에 “보완수사가 필요하다”는 검찰의 지시로 석방된 상황이다. 이 씨의 혐의가 인정될지, 실형이 선고될지를 두고 수사기관들의 남모를 고민이 깊어가고 있는 가운데 다른 폭력조직들의 행보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