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번 사건을 그저 단순한 연쇄 강도 및 성폭행 사건으로 보기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대개의 성범죄 피해자들이 범인에 대해 적개심을 보이는 데 반해 일부이긴 하지만 이번 사건의 피해 여성들은 되레 피의자와 ‘이상한 관계’로 발전했던 것. 심지어 한때 피의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한 여성은 후에 그의 범행 파트너로 나서기도 했다. 그의 범행 수법에 어떤 특별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던 것일까.
지난해 8월 출소한 김재명씨(가명·36)가 경남 창원으로 내려간 것은 지난 6월께. 이발 관련 자격증을 땄지만 전과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릴없이 사우나와 찜질방 등지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가운데 생활비는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 상황에서 김씨가 선택할 수 있는 돌파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그는 범죄의 유혹에 또다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김씨의 첫 번째 범행은 지난 6월 중순 창원시 사파동 주택에 침입하면서 시작됐다. 집주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사이 빈방 옷장과 서랍장을 뒤져 2백50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것. 하지만 이같은 방식으로 몇 차례 이뤄진 강·절도행각은 이어질 범죄들에 비하면 고작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몇 건의 절도로 충분히 몸을 푼 김씨는 며칠 뒤 본격적으로 범행에 나섰다. 그의 시야에 포착된 범행대상은 당시 단란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정미옥씨(가명·31).
지난 6월 중순 새벽 일을 마친 정씨는 봉곡동에 있는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혼자 TV를 보고 있던 그녀는 얼마 뒤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복면을 한 사내가 방범창을 통해 침입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것. 물론 ‘검은 복면’은 바로 김씨였다. 겁에 질린 그녀에게 흉기를 들이대 현금 13만원을 빼앗은 김씨는 “네가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라며 성폭행까지 자행했다.
상황은 ‘일’이 끝난 뒤 묘하게 반전됐다. 옷을 추켜입으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김씨에게 정씨가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 것. 둘의 대화는 20분 남짓 이어졌다. 이윽고 정씨는 “맥주나 한잔 하자”며 김씨를 붙잡기에 이르렀지만 김씨는 “약속이 있다”며 집을 빠져나왔다.
이런 정씨의 태도에 충분히 안심이 됐던 것일까. 김씨는 대담하게도 다음날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아 전날 빼앗았던 돈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친절’을 보였다. 이때 정씨는 속으로 ‘(김씨가)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씨는 간간이 그녀의 집을 찾았다. 심지어 주소지까지 그녀의 집으로 옮겨놓았다. 성폭행범과 피해자 관계에 ‘국적’ 반전이 이뤄졌던 셈이다.
권씨를 따라 살금살금 침입한 김씨는 잠에 빠져 있던 그녀를 깨워 성폭행했다. 권씨의 화장대 위에 놓인 그녀의 사진을 보고 “너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겼냐”고 내뱉은 말이 그녀를 향한 ‘유혹’의 전부였다. 범행을 마친 뒤에는 그녀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내고 유유히 집을 나섰다.
성폭행범과 피해자의 관계가 ‘연인사이’로 바뀐 것은 그날 낮 12시. 김씨는 마치 새벽에 벌어졌던 일은 잊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히 권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간밤의 찜찜한 기억을 지우지 못한 그녀였지만 “잠은 잘 잤냐. 집 앞에 와있는데 밥이나 같이 먹자”는 김씨의 말에 이끌려 마지못해 집을 나섰다.
그것이 실수였을까. 지난 새벽과는 달리 우황청심환을 사주는 등 깔끔한 매너를 보인 김씨에게 그녀는 그만 이성의 감정을 품고 말았다. 이후에도 권씨와 정씨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성관계를 맺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같은 달 25일, 김씨는 또다른 피해자 김소희씨(가명·30)를 대상으로 범죄행각을 이어갔다. 역시 새벽에 귀가하는 그녀의 뒤를 쫓아 원룸 방범창을 뜯고 침입한 것. 그녀는 그날 마침 전세 보증금을 낼 요량으로 현금 1백80만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도 김씨와 마주친 그녀는 “나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죽이든 살리든 당신 마음대로 하라”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피해자가 체념하는 태도를 보이자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일까. 김씨는 현금을 가져가는 대신 “오늘은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다”며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일을 계기로 가까워진 둘은 다음날 그녀의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피해자 김씨는 창원시 D단란주점을 그만두고 K주점으로 옮긴 상태였다. D주점을 그만둔 이유는 주점 사장 이신화씨(여ㆍ가명ㆍ46)의 남동생 이신호씨(가명)와의 동거생활이 파경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나름대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이씨와 동거하면서 그동안 푼푼이 모아온 돈 4천만원 가량을 모두 그에게 쏟아부었지만, D주점 여사장 이씨는 “동생 일은 나와는 별개의 문제”라며 김씨 이름 앞으로 돼 있던 외상값 4백만원을 모두 갚으라고 요구했던 것.
이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피해자 김씨는 비록 자신을 상대로 범행을 시도했던 김씨였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속사정을 알게 된 김씨는 D주점 여사장의 집 위치를 물은 뒤 “내가 한번 가봐야겠다”며 해결사 역할을 떠맡고 나섰다.
피해자 김씨는 “그렇게 되면 나를 의심할지도 모른다”며 만류했지만 김씨는 이를 뿌리치고 사라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나타난 그는 그녀가 외상값으로 주점 여사장에게 변제했던 돈 중 1백60만원을 그녀의 손에 되돌려주었다. 여사장을 성폭행하고 돈을 빼앗아 왔던 것.
이 일이 계기가 돼 둘은 아예 범죄 파트너로 나서게 된다. 김씨의 차로 새벽녘에 귀가하는 여성을 쫓아간 뒤 김씨가 원룸으로 침입해 강도와 성폭행 행각을 벌이는 동안 그녀는 차 안에서 망을 보는 식이었다.
수차례에 걸쳐 호흡을 맞춰 범행을 일삼던 이들의 꼬리가 잡힌 것은 지난 10월19일. 김씨는 이날 역시 새벽을 틈타 회사원 천양진씨(가명·28)의 원룸으로 침입했다. 하지만 여느 피해자와 달리 천씨는 흉기를 들이대는 김씨 앞에서도 기지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휴대전화에 미리 단축번호 0번으로 입력해 놓은 파출소로 전화를 걸어놓은 뒤 김씨에게 주소를 알려주는 것을 가장해 강도가 들었다는 사실을 알린 것.
천씨를 상대로 막 성폭행을 감행하려던 중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김씨는 그대로 달아난 덕분에 가까스로 경찰과의 대면은 피할 수 있었다. 꼬리가 밟혔다는 사실에 다급해진 김씨는 그로부터 3일 뒤 자신이 두달여 전 성폭행했던 권씨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리곤 애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정미옥씨를 경찰서로 보내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과 달리 경찰서로 들어간 정씨는 경찰의 설득에 넘어가 되레 김씨의 휴대전화번호를 경찰에 알려주게 된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김씨는 권씨의 집에서 무심코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경찰에 검거되기에 이른다. 경찰 조사 중 김씨는 “일자리는 못 구하고 생활비는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질렀다”며 선처를 바랐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