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백정화씨(가명•여•42)는 동거하던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단지 희박한 주변 정황만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그녀는 2심에 이어 최근 대법원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녀에게 쏠렸던 수많은 오해의 시선들은 거두어지겠지만 강압 수사와 오심으로 10개월간 무고한 옥살이를 살아야 했던 백씨의 ‘망가진 삶’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할까. 수사기관의 고질적인 꿰맞추기식 수사, 선입견에 의한 재판 등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 이번 사건을 따라가봤다.
지난 2001년 8월22일 새벽 0시45분 백정화씨는 다세대 주택 2층에 있는 자신의 전세방에서 동거하고 있던 김동철씨(가명•48)와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 두 사람은 비록 혼인신고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지난 2000년부터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온 터라 실제로는 부부나 다름없었다.
술기운 탓이었는지 평소 소심했던 김씨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던 것. 김씨가 흥분함에 따라 백씨는 슬며시 방을 빠져나왔다. 방 안에서 ‘윽윽’하는 외마디 신음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씨가 정체불명의 비명을 듣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을 때 김씨의 가슴과 복부에서는 이미 선혈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씨는 즉시 119구급대에 전화를 걸어 김씨를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가슴과 복부, 아홉 군데를 흉기에 찔린 김씨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찰은 세 가지 정도의 정황증거로 백씨를 살인용의자로 지목했다. 사건 발생 직후 숨진 김씨의 가슴과 복부에서 아홉 곳이나 흉기에 찔린 상처가 있었던 점, 김씨가 숨지기 직전 백씨와 심하게 다투었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웃 주민들의 진술, 그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남부분소(부산 영도 소재)의 부검결과 김씨가 타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견 등을 근거로 했다고 한다.
백씨는 수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경찰은 “부부싸움을 벌였고, 외부인 침입이 없다. 게다가 가슴과 복부에 아홉 곳이나 칼에 찔려 숨졌는데 당신이 아니면 누가 죽였겠는가”라면서 백씨를 살인범으로 몰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경찰의 수사과정은 현장상황에 대한 정밀감식 등의 초동수사와 탐문 등을 통해 용의자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처음부터 범인을 지목해놓고 여기에 부합할 만한 억지 증거를 수집하는 ‘꿰맞추기식’ 수사를 벌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이후에도 백씨는 일관되게 혐의사실을 부인했지만 검찰의 조사도 경찰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찰은 보충조사를 벌이면서 “혐의를 부인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다”고 백씨를 몰아세우며 무조건 자백을 강요하는 식이었다.
이 같은 경찰과 검찰의 ‘엉터리 수사’로 기소된 백씨는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는 ‘진실의 힘’만 믿고 1심 재판부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1심 재판부인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은 지난 1월 검찰의 공소사실 대부분을 인정해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백씨에게 중형인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백씨는 즉각 항소했다. 2심에 접어들면서 새로 선임된 박봉환 변호사는 수차례 접견을 통해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는 백씨의 모습에서 ‘백씨가 결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우선 유죄의 유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김씨의 가슴과 복부의 자창이 타살이 아닌 자살로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데 주력했다.
박 변호사는 의료인 등의 도움을 받아 법의학 선진국인 미국에서 한 육군 대위가 자신의 가슴과 복부를 무려 26차례나 칼로 찔러 자살한 사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조사 결과 미국에서는 10차례 이상 스스로 가슴과 복부를 찔러 자살한 예가 많았고 국내에서도 20차례나 가슴과 복부를 찔러 자살한 예를 발견했다.
이 사례들을 2심 재판부인 부산고법 형사2부(재판장 김수형 부장판사)에 제출했다. 2심 재판부는 이 같은 결과를 토대로 숨진 김씨의 부검사진과 비디오테이프 등 관련 자료를 서울대 법의학팀 이윤성 교수에 보내 정밀 감정을 의뢰했다. 이윤성 교수는 감정서와 법정증언을 통해 ▲김씨의 몸에서 방어흔이 발견되지 않은 점 ▲범행 현장에서 반항하거나 방어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수 없는 점 ▲명백한 주저흔(통상 자살할 때 생기는 것으로 흉기에 긁히는 상처)이 여러 곳 발견되고 ▲자창의 형태가 일정한 점 등을 들어 김씨의 사인은 자살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최초로 김씨를 부검하고 타살의견을 냈던 국과수 관계자를 법정에 출석시켜 증언을 듣는 과정도 거쳤다. 이 관계자는 법정에서 “단지 사체의 부검결과만을 갖고 판단한 것이고, 백씨의 몸이나 의복 등에 묻은 혈흔과 사건 현장, 그리고 주변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다시 부검소견을 낸다면 자살과 타살의 가능성은 반반”이라며 당초 주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결국 재판부는 지난 6월 백씨가 결혼을 전제로 사귀던 김씨를 칼로 아홉 차례나 무자비하게 찔러 살해할 만한 특별한 동기가 없고 김씨의 가슴과 복부에 난 아홉 곳의 상처도 주저흔이 있는 등 자살의 가능성이 높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백씨가 동거남인 김씨를 살해했다고 판단할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2심 재판부의 무죄판결은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인정돼 지난달 13일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사체에 대한 치밀한 법의학적 분석, 무죄추정의 원칙을 견지하고 엄격한 증거재판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낸 재판부의 노력, 무죄를 확신한 변호사의 성실한 변론 등이 어우러져 ‘억울한 범인’은 마침내 살인누명의 벽을 넘었던 것이다. 배재한 국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