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12월 초등학교 2학년 여아가 납치된 뒤 살해당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줬다. 같은 달 19일 아이의 큰아버지가 유력한 살인 피의자로 검거된 뒤, 이번에는 사건의 해결에 최면수사가 활용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사건은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실제로 경찰은 목격자의 희미한 기억을 최면수사를 통해 되살려 피의자의 주요 신체특징을 정확히 파악해냈다. 그로부터 5일 뒤 피의자는 경찰에서 범행 일체에 대해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동생에 대한 미움이 결국 조카를 살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고백한 범행동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음표는 여전히 남는다. 범행 일체를 자백한 피의자가 정작 목격자가 그를 봤다고 주장하는 장소에 간 일이 없다며 한사코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행을 시인한 마당에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피의자의 주장을 배척하기도 어렵다. 또한 사건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목격자가 보지도 않은 사실을 보았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목격자 진술을 의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만약 ‘그 장소에 간 적이 없다’는 피의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과연 목격자는 무엇을 보고 피의자의 인상착의를 떠올린 걸까. 혹시 억울하게 죽은 아이의 영혼이 목격자를 움직인 건 아닐까. 경찰 역시 “미스터리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
지난 12월11일 부산에 사는 이종미씨(가명ㆍ48)는 차를 몰아 경남 김해로 향하고 있었다. 부산 을숙도 인근 강변로를 지날 무렵 이씨는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천히 시선을 옮긴 이씨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포착됐다. 거래처 이 사장의 딸 민지양(가명·9)이었다. 속으로 ‘아이고, 이 사장 딸이 아닌가’라며 반가워 하던 이씨. 동시에 민지양의 손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끌고 가는 모습도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 사람 옆에는 또다른 남자 한명이 있었다. 낯선 사내가 민지양을 차에 태우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이씨는 곧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이씨는 다른 일로 경찰서를 찾았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지게차의 운전사가 인명사고를 낸 탓이었다.
사고 처리를 위해 부산 사하경찰서에 들른 그녀는 경찰서 게시판에 붙어 있던 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배전단에 실린 유괴된 아이의 모습은 분명 이 사장의 딸 민지양이었다. 경찰에서 어렵사리 기억을 되살리던 이씨는 정작 중요한 ‘낯선 남자’의 얼굴만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최면기법을 이용, 수사 단서를 얻어내고 있는 장면(기사의 특정사실과 관련없음). | ||
경찰 용의선상에 올라와 있던 민지양의 큰아버지 이홍택씨(가명·39)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했다. 최면수사를 통해 수사망을 좁힌 경찰은 지난 2002년 12월19일 이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경찰이 파악한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피의자 이씨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36)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언어장애 탓인지 아버지의 관심이 자신에게서는 멀어진 것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형제간의 갈등은 지난 97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전기부품 회사가 동생에게 상속되자 극에 달했다. 그동안 자신이 함께 땀흘려 키워온 회사가 엉뚱하게 동생에게 돌아가자 이씨의 가슴 속에서는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라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 분노가 폭발한 것이 지난 2002년 12월11일 오후 2시께.
경찰에 따르면 이날 이씨는 부산 사하구 하단동 G아파트로 귀가하던 민지양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인근 마을 농가로 데려갔다고 한다. 죽음을 예감한 민지양이 ‘큰아버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이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곳에서 민지양을 목졸라 숨지게 한 이씨는 다음날 이미 숨진 민지양의 입에 독극물을 넣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어 그는 범행을 영영 숨기기 위해 농가 마당에 민지양을 암매장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이씨는 자신의 처남에게 민지양을 납치한 날의 알리바이를 조작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만약 경찰이 물어올 경우 같은 달 초 부산 초량동에 있는 처남의 편의점에 찾아가 함께 술을 마셨던 것을 11일에 있었던 일로 말해달라는 것.
하지만 민지양의 죽음이 평소 민지양 가족과 원한관계에 있는 면식범의 소행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경찰의 눈을 따돌리기는 힘들었다. 경찰은 이씨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고 같은 달 19일 불안감에 휩싸여 민지양을 암매장한 장소를 몰래 찾은 이씨를 검거했다. 물론 이 사이에 목격자 이씨에 대한 최면수사도 있었다.
검거된 뒤 이씨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동생에 대한 미움 때문에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순순히 범행을 시인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은 여기서 발생했다. 목격자 이씨가 그를 봤다고 하는 을숙도 인근 강변로에 간 일은 결코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 아파트에서 민지양을 납치한 뒤 범행 장소인 인근 마을 농가로 데려가기까지 한 번도 차에서 내린 적이 없었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었다.
당황한 것은 경찰이었다. 범행을 시인한 피의자가 그런 ‘사소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또한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3자가 굳이 보지도 않은 사실을 봤다고 할 리도 만무했다.
피의자의 주장대로라면 목격자 이씨는 피의자가 가본 적이 없는 곳에서 그를 본 셈.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찰 관계자도 “둘 사이의 엇갈린 진술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라며 의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