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본부의 한 관계자가 사건들이 벌어졌던 현 장 약도를 가리키고 있다. 현장들은 최근 크게 변모한 상태다. | ||
예컨대 4차 사건의 경우. 희생자인 이계숙씨(당시 23세·여)는 사건 현장에서 빨간 옷을 입은 채 발견됐다. 이 사실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태안읍에는 “빨간 옷을 입으면 당한다”는 헛소문이 사실처럼 퍼졌다. 이에 수사본부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혀 우범지역으로 보내는가 하면, 관내에 근무하던 의경 4백여명에게 모두 빨간 모자를 씌워 근무시키기도 했다.
계속되는 살인사건은 동네 주민과 경찰 사이에 불신을 키우기도 했다.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태안읍 젊은 사람들 가운데 경찰 조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사본부의 간부였던 한 퇴직 경찰관은 “조사를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다. 초반에 여자일지 모른다고 해서 다 조사했고, 범인이 음모를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사의 스님들도 조사했다. 목욕탕을 뒤지며 무모증인 사람을 찾아다닌 적도 있다”고 말했다.
수사본부 간부들이 답답한 나머지 무속인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 이 과정에서 경찰은 재미 심령술사의 말만 믿고 수원에 사는 김아무개씨(당시 46세)를 상대로 강압적인 수사를 펼치다 김씨가 결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수사본부에서는 2차 사건 이후 무속인의 권유에 따라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고 쓰인 제웅을 사건 현장에 세우기도 했다. 제웅이란 액막이로 쓰이는 허수아비의 일종. 지난 88년 화성경찰서 정문이 동쪽으로 10m 옮겨간 것도 ‘경찰서 정문이 북향이라 재수가 없어’란 점쟁이의 말 때문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8차 사건 직후 수사본부의 간부 두 명이 벌인 해프닝일 듯 싶다. 당시 이들 간부 두 명은 “서해바다에서 발가벗고 목욕을 한 뒤 치성을 드리면 한달 내 범인이 잡힐 것”이란 역술인의 조언을 듣고 한 겨울 서해안 갯벌에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다 그만 초병에게 들키고 말았다. 사건해결이라는 일념으로 체면도 팽개친 채 알몸 치성을 드리다 도망쳐야 했던 수사본부의 간부 두 명. 이 장면은 화성 연쇄살인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