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김선달 사건에 나오는 ‘물’이 아니라 신도들의 관심이 많은 ‘사리’가 이 사건에 등장하는 물건이다.
‘사리’란 입적한 스님들의 다비가 끝난 뒤 나오는 구슬 모양의 유골. 불가에서는 “사리가 고승의 법력이나 수행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며 애써 사리의 의미를 제한한다. 반면 세속에서는 아직도 사리를 수행의 결정체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 수행 높은 노스님들조차 입적하기 전에 자신의 몸에서 과연 사리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 은근히 걱정하는 것도 이런 세속의 관심 때문이다.
최근 이 사리를 둘러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경남 양산의 한 사찰 주지스님이 모든 사람들의 몸에서 사리를 추출할 수 있다는 ‘사리채취기’로 신도들을 현혹해 돈을 가로챈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것. 이 주지스님은 또 “재일동포 유골 송환사업에 참가하게 해주겠다”며 접근한 H신문사 설립자의 처남에게 되레 사기를 당해 이 돈 가운데 일부를 날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죽은 시체’를 둘러싼 ‘산 사람’들의 물고 물리는 사기극이 펼쳐졌던 것이다.
유몽학씨(가명·54)는 이 사찰의 주지스님이었다. 불교의 여러 종파를 거치는 동안 이런저런 구설에 올라 승적을 몇 차례 박탈당하기도 한 그는 자신이 직접 이 사찰을 세웠다. 그에게 이 사찰은 불가에 발을 붙일 수 있었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나 이 사찰은 유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신도들이 모이지 않았다. 인근 사찰에는 몰려드는 신도들로 연일 초만원을 이루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유씨로선 분통터질 노릇.
전 재산을 ‘올인’해 마지막으로 베팅한 K사찰이 신통치 않자 답답해진 유씨는 엉뚱한 곳에 눈을 돌렸다. 평소 그가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기발한 기계 하나를 소개받은 것이 계기였다. 기계는 이름도 그럴듯한 ‘사리채취기’였다.
이 기계의 원리는 이랬다. 사람의 시신을 이 기계에 넣고 일정 시간 태우면 오색 영롱한 사리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는 것. 불교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허무맹랑한 얘기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5천만원을 투자받아 이 기계를 구입했다. 실제 기계값은 1천만원에 불과했지만 5천만원으로 부풀려 투자를 받은 것. 그런 뒤 그는 나머지 4천만원을 착복했다.
나름대로 떨리는 마음으로 직접 죽은 사람의 시신으로 실험을 해본 유씨. 그런데 사리는커녕 매캐한 연기와 고약한 냄새만 나는 게 영락없는 고철덩어리였다. 그는 사람뿐 아니라 소를 화장해 보기도 했다. 심지어 동네에 돌아다니고 있던 개까지 기계에 넣고 태워보았다.
하지만 기껏 죽은 소를 태울 때 ‘사리 비슷한 것’ 한 과가 나왔을 뿐이었다. 낭패였다. 그때 그의 뇌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그는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세게 한번 질러 보자’는 검은 마음을 먹게 됐다. 유씨의 ‘사리채취업 사기’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유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최아무개씨 등 2명과 함께 부산 초량동에 N장례식대행사를 세웠다. 이때부터 유씨는 자신의 사찰 신도들을 대상으로 이 기계에 대해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유씨는 지난 2000년 7월24일 자신의 사찰에 신도로 있던 정운임씨(가명)에게 소뼈에서 추출된 사리 샘플을 보여주며 “이것은 소뼈에서 나온 것인데, 이 기계를 이용하면 사람에게서도 누구나 사리가 나올 수 있다”고 현혹했다. 유씨의 말에 순진한 신도 정씨는 눈이 휘둥그레져 ‘나무아미타불’을 연발했다.
이런 정씨를 보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유씨는 “이 기계로 빨리 돈을 벌어 자식들에게 유산이나 많이 물려주자”며 “3천만원씩만 투자하면 3개월 안에 투자금액 이상을 반드시 돌려준다”고 허풍을 쳤다. 물론 정씨는 투자금 명목으로 3천만원을 선뜻 내놨다.
검찰에 따르면 유씨는 이와 유사한 수법으로 또다른 피해자 2명에게도 각각 3천만원씩을 투자받아 모두 9천만원을 가로챘다는 것. 그는 신도를 모아 돈을 버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수완좋은 말솜씨 덕분에 금세 한몫을 챙긴 셈이었다.
막상 주머니는 두둑해졌으나, 유씨에게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피해자들로부터 투자받은 이 돈을 어떻게 굴리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때 유씨보다 한 수 높은 ‘고수 사기꾼’이 나타났다. 관록의 ‘사기꾼’ 이원섭씨(가명·72)였다.
이씨는 배경부터 유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씨는 H신문사 설립자인 장아무개씨의 처남으로 한때 H신문사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현재는 신문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여전히 ‘H신문사 설립자 겸 상임고문’이란 명함을 지니고 다녔다.
이씨가 유씨를 불러낸 곳도 서울에 있는 H신문사 사무실. 유씨가 신도들을 속여 거액을 받아 챙긴 직후 함께 한 자리에서 이씨는 “나는 일본 자민당 국회의원인 ○○○와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라며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가뜩이나 지방에서 갓 상경해 유수의 신문사 사무실을 방문한 유씨로서는 일본 유력 정당의 간사장 이름까지 들먹이는 이씨 앞에서 위축됐다.
이씨는 이런 유씨에게 “재일동포 유골 송환사업을 같이 해보자”며 로비자금을 요구했다. 연방 진땀을 흘리던 주지스님 유씨는 이씨의 이 말에 속아 약 3천만원을 건넸다. 물론 이씨에게 ‘재일동포 유골 송환사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형제지간처럼 지낸다고 거론한 일본 국회의원도 이씨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였음은 물론이었다.
허무맹랑한 사리채취기로 신도들을 속인 K사찰 주지스님 유씨와 재일동포 유골 송환사업을 한다며 또 이 주지스님을 속인 이씨.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사리채취기에 거액을 투자한 뒤 달콤한 ‘열매’를 기다리다 지친 피해자들의 고소로 끝내 검찰에 구속되고 말았다.
사건을 담당한 부산지검 형사부 예세민 검사는 “누구에게나 사리가 나온다고 순진한 신도들을 현혹한 유씨나, 집안 배경을 업고 여기저기 사기를 치고 다닌 이씨나 모두 똑같은 사람이지만 단수를 따진다면 이씨가 한 수 위 고수인 셈”이라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