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규 장군 | ||
평남 평원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와 ‘문회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유하현의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1년 조선혁명당에 가입, 군사령부참모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봉천성 영릉가전투’와 ‘통화현전투’ 등이 대표적인 전공.
조선혁명군에 모여든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에 나선 김 장군은 조선혁명당을 대표하여 중국 남경에 파견되어 조선의용대·조선독립당·광복동지회를 포함한 약 6개 조직과 회합하여 ‘한국항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여 민족주의자 계열을 상해에 집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이 중국 중경에서 편성되자 ‘총사령부참모’로 취임했으며 1941년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취임한 뒤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1945년 미군과 합동작전으로 특수공작반(OSS)을 설치하여 국내진공작전을 도모하던 중 조국광복을 맞았다.
해방 이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상해판사처처장(駐上海辦事處處長)에 임명되어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들의 안전귀환을 위해 활동, 3만여 명의 교포를 귀국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1946년 9월에는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의 ‘만주특별당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장군 김학규의 귀국 이후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48년 4월 귀국한 김 장군은 그 해 7월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에 취임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5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형을 살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에 석방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재수감되는 등 곤욕을 치른 그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고, 1967년 지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