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26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행사’ 당시 찍은 기념사진. 맨 왼쪽이 노무현 대통령의 친조카를 사칭한 노씨, 한 사람 건너 밥 리빙스턴 전 미 하원의장, 유재건 의원, 이준구씨. | ||
자신을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의 딸로 소개한 노아무개씨(39)는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미주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행사장’을 활보하고 다녔다. <일요신문>이 당시 현지의 행사 자료를 입수한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행사준비위원장 겸 한국측 대표로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기행각에 밥 리빙스턴 전 미 하원의장을 비롯한 미국의 유명 인사들은 물론, 유재건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미 태권도계의 대부로 알려진 백악관 자문위원 이준구씨(미국명 준 리),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 클로드 최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그녀는 한미 양국의 거물급 인사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앞세워 국내에서 행사 후원금 명목으로 본격적인 사기 행각을 벌이다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의해 덜미를 잡혔다. ‘대통령 친조카’라는 말 한마디에 거주지도 직업도 일정치 않은 전과 2범의 한 여성은 이처럼 한·미 양국의 VIP들을 마음껏 농락했던 것이다. 노씨가 국내외 유명 인사들을 상대로 벌인 사기행각을 추적했다.
지난 6월26일 저녁. 미국 워싱턴시 국회의사당 러셀빌딩 코커스룸에서는 한인 이민 1백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는 하나(We Are Together)’ 라는 공연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한·미 양국의 유명 인사들이 가득 자리를 메운 이날 행사장에서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 차림의 한 한국인 여성이 등장해 참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여성은 이날 행사의 한국측 대표로 소개됐고, 그녀는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연설을 했다. 이후 여성은 미국의 전 하원의장을 비롯, 한·미 현역 국회의원 및 정·재·문화계 인사들과 인사 나누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한미의원교류협회의 한·미 양국 회장인 유재건 의원과 에드워드 로이스 하원의원, 그리고 이준구씨, 밥 리빙스턴, 제임스 제퍼즈 캐서린 해리스 의원 등 한미 정계 인사와 클로드 최, 소프라노 박남현, 인기가수 김범수, 테너 지저스 가르시아 등 정상급 아티스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노씨가 이날 뿌린 명함에는 서울에 주소를 둔 한 회사의 대표이사직과 ‘한미문화예술교류재단’ 한국측 대표 겸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친조카’라는 주변의 설명도 뒤따랐다. 물론 이 같은 설명은 그녀에 대한 주변의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실체는 고졸 학력과 국내에 주거지도 일정치 않은 전과 2범의 사기꾼이었다. 졸지에 노씨의 사기 행각에 들러리를 선 꼴이 된 당시 참석자들은 궁색한 입장에 빠졌고, 노씨를 믿고 이 행사를 주최한 한미문화예술교류재단은 현재 엄청난 빚을 떠안은 채 허탈감에 빠져 있다.
부산에 주소를 둔 노씨는 공금횡령과 사기 전과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이아무개씨와 동거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거인 이씨 역시 사기 전과 7범으로 현재도 횡령 등으로 경찰에 의해 수배중이다.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노씨 종친회’에 들락거리며 자신이 노 대통령과 같은 해음공파이며, 노 대통령의 조카뻘이라고 떠벌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노씨 종친회의 한 관계자는 “종친회 내에 9개 문중이 있는데, 해음공파는 그 가운데 하나로 넓게 보면 노 대통령과 같은 파가 맞다.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19촌쯤 된다. 그런데 별다른 직업도 없는 이들 부부가 자주 모임에 나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해 사람들이 모두 마땅찮게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올 들어 유난히 종친회 모임이나 총회 자리에 자주 참석해 거들먹거리고 다녔다”고 기억했다.
노씨는 평소 안면이 있던 연예기획사 A사의 김아무개 대표를 통해 지난 5월 중순경 서울 장충동의 한 음식점에서 클로드 최씨를 만났다. 최씨는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로 당시 한미문화예술교류재단 이사와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행사 음악 총감독을 맡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노씨는 자신을 노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의 딸이라고 소개하면서 “양국의 뜻깊은 문화 행사를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행사가 국내 대기업의 후원 아래 열린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노씨는 “나를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에 앉히면 청와대의 물밑지원 아래 효과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최씨를 속였다. 후원금을 가로챌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의 재단 대표인 권아무개씨는 노씨에게 재단 한국측 대표와 행사준비위원장 자리를 선뜻 내줬다. 대통령 조카라는 말 한마디가 보여준 위력이었다. 그리고 사전답사 명목으로 노씨를 초청했다. 지난 5월31일 노씨는 60대의 한 노인과 40대의 여인, 그리고 김 대표를 대동하고 미국을 방문했다. 60대 노인 노아무개씨는 노씨 종친회 회장, 40대 여인 홍아무개씨는 영부인 권양숙 여사의 전속 헤어디자이너로 각각 현지에서 소개되었다. 노씨는 김 대표를 자신의 수행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다.
▲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행사 모습. | ||
노씨 일행은 4박5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 명소들을 관광하는 등 6천20달러(약 7백22만원)의 경비를 재단측에게서 제공받았다. 이 자리에서 노씨는 재단측에 “행사비 2억원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고, “박물관의 한국실이 너무 초라하니 청와대에 건의해 규모를 확장하도록 힘써 보겠다”는 허풍까지 쳤다.
귀국한 노씨는 지난 6월13일 김 대표를 통하여 재단측에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 이메일 내용을 보면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노 대표(노씨 자신)가 친인척 관리대상 1호로 자신을 지목했다. 청와대에서 이 행사에 대해 자세히 확인하고 물어봤다. 현재 노 대표가 설명하다가 김 사장(김 대표)이 추가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고 인사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개인 재단이 하기에는 어려우니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진행은 현재대로 해 나가되 필요한 지원이 있으면 물밑에서 해주겠다고 한다. 여기에는 권 여사 조카인 비서관도 함께 참석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행사비는) 반드시 송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씨는 미국 현지의 행사일인 지난 6월26일 다시 워싱턴을 방문했다. 이때에도 노씨 일행의 호텔비 및 여행경비 3천달러(약 3백60만원)를 재단측에서 모두 부담했다. 노씨는 이 자리에서 행사비 15만5천달러(약 2억원)를 7월15일까지 상환하겠다고 권 대표에게 지불각서까지 써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국 워싱턴 현지의 권 대표는 행사비 결제가 자꾸 지연되면서 문제가 생기자 결국 자신이 대신 변제를 해준 뒤 노씨로부터 연락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소식은커녕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권씨는 노씨의 사기행각을 고발하는 내용의 투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물론 당시까지도 권씨는 노씨가 노무현 대통령의 조카라고 알고 있었다. 이 투서가 접수된 것이 지난 9월5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는 대통령의 조카를 사칭한 사기 사건임을 직감하고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수사를 의뢰했다. 특수수사과 5팀장 하영수 경감은 “수사 결과 자신이 대통령의 친조카인 것처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온 전형적인 대통령 친인척 사칭 사기범이었다. 문제는 당장 확인이 가능한데도 유명 인사들이 어떻게 이런 여자에게 속아 넘어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측은 “노씨가 준비위원장 직함이 찍힌 명함과 함께 현지 행사장에서 유명 인사들과 찍은 사진들을 갖고 전경련과 대기업 S사, D사 등을 찾아다니며 후원금을 얻고자 접촉한 흔적은 발견했으나, 계좌추적 결과 직접적으로 후원금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고 밝혔다. 특수수사과의 한 관계자는 “개인사업가인 김아무개씨로부터 후원금조로 1천만원을 받은 것이 현재 밝혀진 금액의 전부”라고 밝혔다.
한편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행사에서 노씨와 함께 사진을 찍고 국내외 유명 인사들을 소개해주는 등 뜻하지 않게 노씨의 사기 행각을 도와준 결과가 되어버린 유재건 의원과 이준구씨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실제 노씨 등은 노 대통령의 대선 후보 특보단장을 지낸 유 의원을 비롯해 세계적인 명사인 이준구씨(부시 대통령 백악관 자문위원)와 찍은 사진을 앞세워 ‘대통령의 조카 사칭’에 활용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유 의원은 “당시 행사장에서 이준구씨의 소개로 노씨를 처음 소개받았으나 사업가라고 들었을 뿐, 대통령 조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준구씨는 “재단 대표인 권씨로부터 노 대통령의 조카라는 소개를 받고 내가 몇몇 지인들에게 그녀를 소개해준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최근에야 경찰청 수사에 의해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긴 했으나, 그녀의 사기행각에 우리가 관계했거나 피해를 본 것은 없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