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연말 친박계는 김 대표를 아주 ‘대놓고 깠다’. 12월 30일 김 대표가 출입기자단 송년 오찬 회동을 하던 같은 시각 친박계가 주축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도 점심을 같이했다. 일종의 힘 빼기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포럼 참석자들의 발언 수위는 꽤 셌다. “당직 인사권을 사유화하는 모습이다(유기준)”, “전당대회 득표율은 29%인데, 당 운영에 있어서 92%의 득템을 하고 있다(윤상현)” 등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런데 김 대표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내가 정치한 지 30년인데,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한다. 나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도 된다. 그런데 우리 당직자 명단을 갖다 놓고 전당대회 때 누구를 지지했는지 보라. 내가 반 이상 (친박에) 내놨다. 반 이상! 전혀 나는 (사당화하고 있지 않다).”
TK(대구·경북)의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김 대표가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인지, 기를 못 펴고 당하는 모습인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싸움을 걸었는데 말려든 모습은 아니었다”며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측면에서 보면 리더로서 진일보한 모습”이라고 했다. 친박계로부터 좀처럼 듣기 힘든 평이다.
지난 1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친박계 중진만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후 친박계가 조금씩 목소리를 키웠다. 19일 회동이 ‘작전 개시’ 신호가 아니었겠느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친박계가 김무성 흔들기에 돌입했고 끌어내리는 쪽으로 분위기를 유도해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치권 호사가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18대 국회 때 홍준표 당시 대표체제의 붕괴 시나리오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당시 홍 대표는 ‘박근혜 보완재’를 외치며 당대표가 됐다. 하지만 전당대회 2위였던 친박의 유승민 최고위원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런 중에 무상급식 파동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퇴장했고 보궐선거에 참패했다. 지도부 책임론이 회자한 데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돈봉투 살포도 뒤늦게 알려지면서 차떼기 정당 이미지가 부활했다.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최고위원이 사퇴하자 ‘홍준표도 물러나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것이 바로 ‘최고위원 사퇴→당 지도부 붕괴’ 공식이다. 전략분석가로 통하는 한 인사는 “현 김무성 대표체제는 계파가 뒤섞여 단단하지 않다. 친박의 분열 전략, 붕괴 시나리오가 충분히 먹힐 수 있는 구조”라고 했다.
지난 12월 30일 친박계가 주축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 송년모임에서 김무성 대표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 쏟아졌다. 사진은 2013년 11월 열린 국가경쟁력강화포럼. 연합뉴스
지명직 최고위원 한 자리를 뺀 당대표최고위원회의를 보자. 서청원 이정현 최고위원이 친박계 핵심, 이인제 김을동 최고위원이 범친박으로 분류된다. 비박에선 김 대표와 김태호 최고위원밖에 없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지난해 최고위원직을 던졌다 다시 돌아오면서 존재감을 거의 잃었다.
정치권에선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지도부 붕괴가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명분이 분명할 것, 다른 하나는 대표직 대체 인물, 즉 ‘중간계투’가 확실할 것. 18대 당시 최고위원 3명의 사퇴는 명분이 분명했다. 게다가 박근혜라는 인물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적임자였다.
그런데 김 대표가 홍 전 대표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김 대표는 박근혜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에 적극적이다. 사학연금 군인연금 개혁도 공무원연금을 끝내고 논의하자고 못 박았다. 자칫 ‘친이계의 몰살’도 가능한 해외 자원외교 국정조사특위도 구성, 가동했다. 박세일 여의도연구원장 내정 카드도 집어넣었다. 친박계가 연말 ‘김무성 사당화’ 논란을 촉발했지만 다른 의원들의 힘을 끌어내지 못한 까닭도 여기 있다. 김 대표는 정책에 있어서만은 청와대 2중대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선 본인의 의중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의 입을 빌리기 때문에 확대해석 여지를 차단한다. 최근 새누리당 비박계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역린’인 청와대 인적쇄신을 정확하게 겨눈 발언이 나왔다. 이재오 의원은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 사건과 관련, “(김기춘) 비서실장이 책임지든지 담당 비서관이 책임지든지, 비선 실세로 알려진 사람들이 책임을 지든지 말끔하게 처리돼야 한다”고 당 회의석상에서 말했다.
정병국 의원은 라디오에서 “누군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인적 쇄신을 해야 되지 않겠나”라고 했다. 당 사무총장인 이군현 의원은 “(이번 사건은 청와대 내) 시스템의 문제이긴 하다”고 했다. 세 사람의 발언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 모두 나왔다. 친이계 수장, 차기 원내대표 후보, 김 대표 측근의 동시다발적 발언이 과연 우연일까 하는 의구심은 있지만 당내에서도 청와대 인적쇄신 요구가 있다는 움직임이 발현한 것이다.
게다가 최근 김 대표는 굳게 닫고 있었던 이슈인 개헌을 다시 꺼내들었다. 7일 비공개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이재오 의원이 개헌특위 구성을 촉구했는데 김 대표가 말을 받아 “대선에 패배하면 5년 내내 정권을 흔드는 후진적 정치 풍토를 바꾸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취지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야기가 나와서 한 말이지, 본인이 먼저 하지는 않았다고 말을 아꼈지만 정치권의 이슈를 김 대표가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12월 30일 국가경쟁력강화포럼 오찬 후 대부분 참석자들은 언론 인터뷰를 사양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김 대표가 겁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최근 이완구 원내대표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비정규직 전환 이슈를 성토했다. 친박 내부의 권력암투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김 대표는 별 성과 없는 친박의 공세를, 또 친박 내 보이지 않는 암투를 즐겨도 되는 분위기다. 자신을 끌어내릴 수 있는 분명한 명분만 주지 않으면 된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