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일어난 곳은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지난 2월24일 벌어진 일이다. 특수절도 등 전과 8범의 피의자 김아무개씨(31). 그는 지난해 10월 교도소를 출소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절도, 강도 행각을 벌이며 생계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생활정보지에 나와 있는 부동산 매매 광고를 보고 집을 방문해 강도짓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낮시간대 여자 혼자 있거나 노약자만 있는 집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김씨가 피해자인 H씨(여·40)를 처음 만난 것은 범행을 저지르기 10일 전. H씨는 방 하나와 부엌 하나가 달린 작은 전셋집을 내놓고 새로운 주인을 찾던 중이었다.
특히 그는 사문서 위조와 컴퓨터를 이용한 사기를 저지른 적이 있을 정도로 범죄를 하는 데 치밀하고 능수능란했다. 사건 당일도 김씨는 몇군데 집을 방문하면서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중 우연히 H씨의 집을 찾게 되었다.
대문을 여는 순간 김씨는 안에서 나온 여자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경찰에 따르면 마흔 살의 H씨는 30대 초반 혹은 20대 후반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고 탄력있는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집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김씨는 H씨의 정감있는 태도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김씨는 H씨가 혼자 산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김씨는 생활정보지에 H씨의 집에 굵은 동그라미를 쳐놓고 그날은 아무 일 없이 물러났다.
다음날도 김씨는 평소와 같이 생활정보지에 나와 있는 집들을 하나하나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씨의 뇌리에는 H씨의 모습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김씨는 또다시 H씨의 집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H씨의 집이 마음에 든다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H씨도 드디어 집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김씨에게 더 절친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김씨는 H씨의 집을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갔다. 김씨는 원래 H씨의 돈을 빼앗으려 했으나 돈보다도 H씨와 어떻게 사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막상 범행은 주저했다.
게다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H씨의 집 주변에는 이웃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김씨가 찾아갈 때마다 H씨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것이다. 김씨는 H씨를 화장실이나 부엌으로 유인하려고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내 다섯 번째로 H씨의 집을 찾아간 김씨는 드디어 범행을 결심했다. 김씨는 H씨와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H씨가 한눈을 판 사이 칼을 꺼냈다. 다음 순간 김씨는 H씨의 목에 칼을 대고 “소리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뒤 스타킹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런 뒤 지갑에서 현금 2만원과 신용카드를 빼냈다.
김씨는 H씨를 칼로 위협하고 돈을 뺏으면서도 H씨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김씨는 H씨에게 “정말 미안하다. 사실은 너와 사귀고 싶다”라며 H씨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김씨가 H씨와 키스를 하려고 입에 묶은 스타킹을 풀어준 순간 H씨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H씨는 흐느끼면서 “사실은 암이다. 시한부 인생이라 이제 얼마 살지 못한다. 제발 나를 두 번 죽이지 말아 달라”면서 김씨에게 애원했다.
김씨는 자신의 앞에서 울고 있는 H씨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고 뺏은 돈만 가지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마자 김씨는 H씨가 신고하기 전에 재빨리 빼앗은 신용카드로 현금 1백40만원을 인출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현금을 찾는 과정에서도 주도면밀했다고 한다. 보통 현금지급기 정면에 카메라가 달려 있으나 김씨가 찾아간 현금지급기는 뒤쪽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김씨의 얼굴이 찍히지 않았다고 한다.
범행이 끝났음에도 김씨는 H씨를 잊지 못했다. 다음날 김씨는 H씨에게 또다시 전화를 해 “경찰에 신고했느냐? 신용카드를 돌려주겠다. 돈을 뺏은 것은 미안하다. 너와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H씨는 “필요없다.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더 이상 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이후로도 김씨는 평소와 같이 생활정보지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범행대상을 물색했고 H씨에게 전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김씨는 H씨에게 전화를 하던 중 잠복해 있던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경찰 조사에게 김씨는 출소 이후 4개월간 특별한 직업없이 생활비를 동거녀에게 갖다주었다고 해 그동안 같은 수법으로 강도짓을 저질러온 것이 들통났다.
김씨의 동거녀는 경찰서에서 증언을 한 뒤 김씨에게 “잘가라. 다시는 보지 말자”고 이별을 선언했다고 한다. 돈도 잃고 사랑도 잃은 처지가 된 셈이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처음에는 H씨 집에서 가져갈 것도 없고 해서 H씨와 사귀어 볼 수 있을까 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H씨가 무서워하면서도 따뜻하게 대해줘 호감이 갔다. 데이트나 한 번 하려고 전화를 계속 했다”고 전화를 건 이유를 밝혔다.
사건을 담당한 마포경찰서 강력반의 한 형사는 “강도를 한 번 저지르면 다시는 그곳에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오히려 피해자에게 반해 주변을 맴돌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황당해 했다.
경찰은 “요즘 봄이 다가오면서 이사를 많이 해 이런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동산 소개소를 이용하면 중개인이 같이 오기 때문에 덜 위험한데 소개비를 아끼려고 생활정보지 광고를 많이 이용하다 보니 사고가 발생한다. 여자나 노약자 혼자 집에 있는 경우 특히 조심해야 한다”며 범죄예방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