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규 KB금융 회장(왼쪽 여덟번째) 등 경영진은 지난 2일 새해를 맞아 ‘경영진 전략 워크숍’을 가졌다. 사진제공=KB금융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12월 30일, KB금융그룹 수장인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취임 후 첫 공식 인사를 단행했다. KB국민은행을 뺀 10개 계열사 중 7개 계열사 사장이 옷을 벗었고, 국민은행 부행장들도 절반 이상이 퇴진했다. 7명의 부행장들 가운데 이홍 부행장과 박정림 부행장을 제외한 전원이 자리를 내놨다. 이밖에 상무급 이상 임원도 본부 임원 29명과 지역본부장 25명 등 총 54명이 교체되는 등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인사 발표 당시 KB금융그룹 관계자는 “금번 인사의 핵심은 조직의 화합과 단결”이라며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를 통해 조직원 모두가 맡은 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기본을 되새기고 이러한 결과로 선임된 경영진들이 솔선수범하여 고객 신뢰와 경쟁력 강화로 이어져 KB금융그룹이 다시금 선도 금융그룹의 위상을 되찾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KB금융그룹의 인사 내용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KB 사태’에 연루됐거나 전임 회장인 ‘임영록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들도 거의 대부분 물러났다는 점이다. KB 사태로 금융당국의 징계를 받았던 윤웅원 KB금융지주 부사장과 박지우 수석부행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이번 인사에서 KB금융을 떠나게 됐다. 이들 외에 임 전 회장이 영입한 인사로 분류되던 장유환 KB신용정보 사장 등도 퇴진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KB 사태의 핵심 당사자인 정병기 감사위원은 이번 인사에서 제외됐다. 정 감사는 전산시스템 교체 문제를 놓고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과 대립했었다. 그는 특히 KB금융의 전산비리를 금융감독원에 알려 KB금융 내분을 촉발시키고 지주와 은행 간 진흙탕 싸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목됐다.
금융권은 지주사 회장과 은행장이 동반퇴진하고, 사외이사들까지 전원 물러나기로 하는 등 KB 사태에 연루된 인물들이 줄줄이 물러나는 마당에 유독 정 감사만 남겨진 것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다. 특히 윤 회장이 윤웅원 부사장과 박지우 수석부행장에 대해 “쓸 만한 인재를 다 내보내면 조직 운용이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는데도 금융당국이 퇴진을 종용했고, 윤 회장이 이를 수용했다는 소문이 퍼져있어 의문을 키우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정 감사의 유임에는 정권실세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금융당국 고위인사가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내고 있다. 금융권에는 이미 이 고위인사가 여러 금융사의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정 감사는 지난 9일 사의를 표명했다. 정 감사는 ‘사퇴의 변’을 통해 “주전산기 전환사업과 관련하여 그간 원칙에 입각하여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설득을 다했다. 관련 임직원분들이 물러나는 변화 속에서 내심 번민의 나날을 보낸 것도 사실”이라며 “이제 일련의 사태가 마무리되고, 다행히 경륜과 인품을 갖추신 신임 윤종규 회장 겸 은행장님을 중심으로 조직결속을 다져가며 새롭게 출범하는 현 시점에 즈음하여, 새로운 KB 경영진의 분위기 쇄신과 경영비전 구현에 힘을 보태기 위해 상임감사위원 직을 사임하는 것이 적기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사진제공=KB금융)이 지난 연말 첫 인사를 단행했다. 그룹 전반에 걸친 대대적 쇄신인사로 평가되지만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 개입 의혹을 낳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보이지 않는 손’ 격인 금융권력이 KB금융에 뻗친 것으로 의심되는 흔적은 또 있다. 이번 KB금융 인사에서 윤 회장은 KB 출신이 아닌 외부 인사를 계열사 사장과 KB 임원으로 대거 영입했다. 표면적으로는 ‘순혈주의 타파’라는 대의명분이 내세워졌지만 실제 속사정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 금융권 인사들의 전언이다.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 인물로는 KB데이타시스템 사장으로 영입된 김윤태 전 산업은행 부행장, 사장으로 승진한 전병조 KB투자증권 부사장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김윤태 신임 사장은 산업은행에서 기업금융과 M&A(인수·합병), 리스크관리 업무를 맡아왔다. 정통 뱅커 출신으로 금융그룹 자회사 사장을 맡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그의 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연찮은 구석이 발견된다. 김 사장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대구고등학교 동문이다. 또 이번 정부 들어 금융권 권력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홍기택 KDB산업은행 회장과는 서강대학교 동문이다.
공교롭게도 TK(대구·경북) 출신에 지난번 이광구 우리은행장 선임 과정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학맥이라는 점에서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에는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는 것이 금융권의 분위기다. 김 사장은 특히 지난해 7월 기업은행 자회사인 IBK자산운용 사장으로 거론됐다가 노동조합의 반발로 선임이 무산됐던 전력까지 있다. 여기에 그가 둥지를 튼 KB데이타시스템의 사업 내용이 김 사장의 커리어와는 거리가 있는 IT컨설팅, 시스템통합(SI) 등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KB투자증권 사장에 오른 전병조 부사장 역시 자연스러운 승진발탁이라고만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전 사장은 우선 김윤태 사장처럼 최경환 부총리의 대구고등학교 후배다. 여기에 그는 행정고시 29회로 경제관료 출신을 일컫는 ‘모피아’이기도 하다. NH투자증권 전무와 KDB대우증권 부사장, KB투자증권 부사장 등 공직에서 물러난 뒤 나름 증권 전문가의 길을 걸어온 데다 내부 출신임에도 금융권에서 전 사장의 발탁을 탐탁지 않게 보는 이유들이다.
이에 대해 KB금융 측은 “전병조 사장은 기획재정부를 박차고 나와 ‘잘해야 본전’인 곳으로 통하던 투자은행(IB)에 투신했고, 첫 번째 발을 들여놓은 NH투자증권을 구조화금융의 강자로, KDB대우증권과 KB투자증권을 프로젝트파이낸싱과 기업금융시장의 강자로 키워냄으로써 그 역량을 충분히 검증받았다”며 “윤종규 회장은 영업역량이 검증된 인사를 중용하고 조직의 화합과 단결에 맞는 인사를 실시함으로써 KB금융그룹이 선도 금융그룹의 위상을 되찾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인사를 실시했다. 금융권에 유명한 분이 있다고 해서 특정 학맥으로 엮는 것은 무리”라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금융권에서는 이번 KB금융 인사가 “또 다른 형태의 관치금융”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KB금융은 주택은행과 국민은행, 국책은행 두 곳이 합병해 만들어진 조직이어서 유독 관치금융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왔다. 또한 각종 ‘채널’을 통한 인사청탁과 줄대기 등의 병폐가 고질병처럼 반복돼 왔던 금융사다. KB 사태로 곪아 터진 상처가 드러나고 관치금융을 척결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KB금융도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지 그래서 더욱 주목받아 왔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윤종규 회장은 취임 초기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은 수첩에 기록해 불이익을 주겠다’며 공정한 인사를 약속했던 인물이다. 그가 스스로 공언했던 약속을 지켰는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첫 인사 결과를 보면 어지간히 압력을 받은 모양”이라고 씁쓸해 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