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 칠순의 교수부부가 둔기에 맞아 숨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2층 단독주택 정원에 주인 잃은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수사진은 머리카락 등 현장 증거물을 추적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 ||
이러한 분위기는 이곳을 찾는 수사관들의 얼굴에서 단번에 읽을 수 있다. 방대한 수사 서류 가방을 든 채 사무실로 들어서는 서대문, 동대문, 강남경찰서 수사·형사과장들의 얼굴은 경직 그 자체다. 이들이 표정이 굳어 있는 이유는 아직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네 건의 살인 사건 때문이다.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 사이에 벌어진 강남 신사동, 삼성동, 종로구 구기동, 혜화동 연쇄 노인 살인 사건이 그것이다. 끝까지 믿어보자던 경찰 주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수사 인력 부족으로 인한 부실 수사, 그로 인한 수사 의지 상실, 여론의 비난이라는 3중고를 겪고 있는 경찰이 과연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론이 나오고 있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연쇄 살인 사건들.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이 사건들의 현주소를 추적했다.
사건1 ‘2003년 9월23일 강남구 신사동 2층 단독주택에서 70대 약대 교수 부부 둔기에 맞아 사망한 상태로 발견’.
사건2 ‘2003년 10월9일 종로구 구기동 2층 단독주택에서 집주인 김아무개씨의 80대 부친과 부인, 아들 등 세 명이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
사건3 ‘2003년 10월16일 강남구 삼성동 2층 단독주택에서 최아무개씨의 60대 아내가 둔기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것을 둘째 아들이 발견, 곧바로 병원에 후송했으나 후송 도중 사망’.
사건4 ‘2003년 11월18일 종로구 혜화동 2층 단독주택에서 87세 김아무개씨와 파출부 김아무개씨가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 범인은 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남’.
이상은 현재 서울시경 형사과 수사관들이 총력을 기울여 수사중인 미제사건 파일의 제목이다.
사건 발생 8개월 째. 그러나 현재까지 이들 사건은 당시 현장 정황 외에 추가로 밝혀진 내용은 전무하다. 네 사건 모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지문이나 머리카락 등 현장 증거물에 대한 감식 결과나 피해자 주변 인물 추적 작업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나마 현장 증거물이 몇 가지 발견됐던 신사동 사건의 경우, 단서를 줄 것으로 예상했던 지문 6개와 장롱에 묻은 손바닥은 모두 사망한 부부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 부인이 쥐고 있던 7개의 머리카락도 DNA검사에서 뚜렷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피해자 이 교수의 부동산 소유 내역과 은행 계좌 추적 작업에서도 사건과 관련된 혐의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 지난해 10월 종로구 구기동의 단독주택에서 팔순 노인을 비롯한 세 명이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 ||
혜화동, 삼성동 사건 역시 범인이 남기고 간 흔적이 없어 수사가 전체적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때문에 노인 연쇄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3개 경찰서는 극히 초보적인 1대1 면접 수사에만 매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현장 증거물 감식은 물론, 사건 초기 큰 기대를 모았던 시민 제보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의자 선별 수사도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3개 경찰서는 관할 지역 거주 및 사건 당시 전출입 전과자, 노인 상대 전과자, 방화 전과자 등을 집중 추적하고 있지만 조사 대상자 대부분이 주소지나 행방이 묘연해 실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경찰은 네 사건을 각기 다른 사건으로 보고 수사 방향을 원점으로 돌려 재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건 발생 초 네 사건 모두를 면식범에 의한 원한 살인에 무게를 맞춘 바 있는 경찰은 가족 내부의 문제, 정신 이상자의 강도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수사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신사동 사건 외에 나머지 세 사건은 일단 동일범 소행으로 판단하고 용의자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기동, 혜화동, 삼성동 사건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2백60~2백65mm 크기의 금강제화 버팔로 운동화의 족적이 현재까지는 유일한 단서다.
그러나 뚜렷한 물증과 목격자가 없는 수사가 장기화되자 최근 경찰 내부에서조차 “이제는 물 건너갔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일부 담당 수사관들 사이에서는 공조대책이나 인력 보강책을 내놓지 못하고 질책만 하는 회의를 진행하는 상부에 쓴소리를 내뱉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사 인력 부족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다. 현재 동대문, 강남, 서대문 경찰서는 최소 인력만을 남기고 수사 인력 대부분이 원대복귀하거나 다른 지역 경찰서로 이동한 상태.
특히 수사가 한창 진행될 무렵인 지난해 말부터 3개 경찰서 강력반 인원 대부분이 탄핵 시위 및 선거 단속 등에 의한 강력반 인력 차출 이후 일관성을 잃은 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담당 수사관들의 수사 의지마저 실종되고 있다.
사건 발생 초 30여 명 수사 인력을 확보했던 동대문 경찰서는 현재 강력 4반의 형사 4명만이 혜화동 사건을 전담하고 있으며, 구기동 건을 담당하는 서대문 경찰서 역시 당초 수사를 맡은 강력 1반이 아닌 3반이 6~7명의 인력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강남경찰서 역시 압구정동 수사본부를 철수하지 않은 채 강력 1반이 신사동, 강력 2반이 삼성동 사건을 수사 중이나 강력 7개반과 형사 4개반이 특별수사대를 편성해 투입됐던 사건 초와는 달리 효율적인 수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