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보요원을 사칭해 거액을 뜯어내려던 사기범들이 당국에 적발됐다. 이들의 범행 대상은 나름대로 사회에 영향력있는 벤처사업가였다. 한 번만 확인해도 쉽게 알 수 있는 너무나 뻔한 거짓말에 이들은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검찰 관계자들은 후진국형 범죄인 유력인사 사칭 사기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기성’이 있다고 말한다. 쉽게 큰 돈을 벌려는 이들이 영락없이 사기꾼에 걸려 큰 화를 당한다는 설명이다.
광학장비 전문업체 H사 대표이사 강아무개씨. 전도유망한 벤처사업가 강씨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왜 당시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98년 창립한 H사는 이듬해에 유망 중소기업으로 지정됐고, 2000년에는 기술경쟁력 우수기업으로 지정될 만큼 잘나가는 회사였다. 그러나 H사는 이후 자금난을 겪게 됐고, 초기 투자자들로부터 거둔 자금은 서서히 잠식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2003년 초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는 투자자들로부터 거센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모든 경영책임을 져야할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그러던 강씨는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소문 하나를 접하게 됐다. 전직 대통령이나 과거 정권의 실력자들이 보관하고 있는 구권화폐를 싼 값에 사들여 되팔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들 전직 대통령이나 정권 실력자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구권화폐를 시중에 내놓지 못해 은밀히 거래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후 강씨는 지난해 초 투자자들로부터 거둔 돈 가운데 남은 돈을 모아 명동 사채시장 등에서 구권화폐를 구입할 계획을 세웠다. 이번 건만 잘되면 그동안의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코스닥 등록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구권화폐를 구입하기 위해 사채시장을 돌아다닌 끝에 강씨는 한 사채업자로부터 유아무개, 조아무개씨 등을 소개받았다. 그때만 해도 강씨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번듯한 사무실까지 차려놓은 이들이 사기꾼일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기꾼들이 그렇듯 유씨도 상당한 언변의 소유자였음은 물론이다. 2003년 1월10일 강씨를 서교동 사무실로 불러낸 유씨는 한 시중은행이 발행한 5백억원짜리 자기앞수표 3장을 내밀었다. 자신도 자금력이 충분하다는 점을 앞세워 강씨를 안심시키려는 수법인 것. 나중에 드러난 것이지만 유씨가 강씨에게 보여준 5백억원짜리 자기앞수표는 도난 수표로 이미 지급정지가 된 상태였다. 그러면서 유씨는 강씨에게 “나는 사실은 미국 CIA(중앙정보국) 비밀요원으로 지하자금을 양성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사기사건에는 바람잡이가 있는 법. 이번 사건에도 바람잡이가 무려 4명이나 등장한다. 물론 역할은 제각각이다. 공범 조씨는 군 정보요원 출신으로 각종 채권을 구해오는 역할을, 박모씨는 미국 FRB(미국연방준비은행) 직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미 연방채권을 구하는 역할을, 다른 2명의 김모씨도 채권을 구입하거나 사기단 총책인 유씨를 CIA 요원으로 믿게하는 역할을 맡아 강씨를 집중 공략했다.
강씨가 자신들의 말에 어느 정도 현혹되자 유씨는 강씨에게 “구권화폐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30억원은 있어야 한다. 그 돈으로 구권화폐를 구입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금 2백억원을 곧 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이 말에 속은 강씨는 그 자리에서 36억원을 유씨에게 건넸다. 유씨는 강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처음에 보여준 자기앞수표 등 일부를 36억원에 대한 담보로 맡기는 치밀함을 보였다.
유씨의 치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씨는 강씨에게 받은 36억원 가운데 3억원을 공범 조씨에게 건네면서 구 정권 실력자가 보관하고 있는 산업금융채권 1백 장을 살 것을 지시했다. 유씨는 또 일주일 뒤인 1월16일에는 FRB 직원 행세를 하고 다니는 공범 박씨에게 미 연방채권인 본드박스를 구입하라면서 강씨로부터 받은 자금 가운데 12억원을 건넸다. 유씨는 자신이 CIA 요원인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CIA 마크가 새겨진 가방과 지갑 등을 사용했다. 강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강씨는 이들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채기도 했다. 36억원을 건네면 며칠만에 60억원으로 만들어 되돌려 준다고 약속했지만 유씨가 이 같은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강씨는 유씨 등이 갖고 있던 수백억원대의 자기앞수표와 1백만달러짜리 지폐 1백여 장들을 생각하면서 “수천억원대를 굴리는 정보요원이 설마 내 돈 36억원을 떼먹으려고 사기를 치겠느냐”고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유씨는 강씨가 자신들을 끝까지 믿는 눈치를 보이자 또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강씨와 같은 회사에 있는 조모씨가 대상이었다. 1월27일 낮 12시 인천의 한 호텔 커피숍으로 조씨를 불러낸 유씨는 태연하게 “금융감독원 친구가 구권화폐를 확실하게 구해놨다. 구권화폐를 사기 위해서는 26억원이 필요한데 돈이 부족하다. 10억원만 구해보라”고 제의했다. 귀가 솔깃해진 조씨는 그날 오후 7시쯤 유씨의 서교동 사무실에서 10억원을 건넸다. 이로써 강씨와 조씨가 사기꾼들에게 건넨 자금은 36억여원으로 늘어났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씨 등은 유씨의 설명대로 수익이 생기지 않자 돈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 23억원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13억원은 고스란히 뜯기고 말았다.
강씨 등은 H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고, 검찰은 강씨 등이 빼돌린 회사자금의 용처를 파악하던 끝에 유씨 등 전문 사기꾼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수사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을 조사하면서 어떻게 10만달러짜리 지폐와 1백만달러짜리 지폐가 있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었느냐고 말한다. 실제로 강씨 등은 유씨 등이 보관하고 있던 10만달러짜리와 1백만달러짜리 위조지폐 1백여 장을 보고 실제라고 믿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강씨 등은 1달러짜리 지폐 중 일련번호가 33번, 66번, 99번으로 된 것은 한 장에 1백만달러에 달한다는 유씨의 말을 순진하게 믿기도 했다. 수사 관계자는 최근 시중에 이 같은 일련번호의 1달러짜리가 1백만달러에 달한다는 소문이 실제로 퍼져있다고 귀띔했다.
손쉬운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꿈꿨던 강씨. 강씨의 꿈은 결국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