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정도였던 이들 부부가 ‘10년 전쟁’을 벌이게 된 속사정은 대체 무엇일까.
지난 2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단독 임치용 판사는 ‘전 남편’을 고소한 뒤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위증한 혐의로 박아무개씨(여·63)와 딸 서아무개씨(36)에게 각각 징역 1월6월,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이들의 죄명은 모해위증죄(형사 사건 등에서 피고인을 모해할 목적으로 위증했을 때 적용). 딸 서씨의 위증을 부추긴 박씨에게는 모해위증 교사죄가 추가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들 모녀에게 실형을 선고했음에도 법정구속을 시키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일까지 전 남편과 화해를 하고 불미스런 일을 접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실 전 남편 서아무개씨(70)와 박씨 부부는 지난 1995년부터 서로 고소와 맞고소를 하며 ‘흙탕물 싸움’을 계속해왔다. 이들이 제기해 재판을 거친 소송 사건만도 6개. 민사, 형사, 가사를 총망라한 재판기록의 높이가 사람 키에 이를 정도다. 이들 기록에는 당사자인 부부뿐 아니라 친척들까지도 패가 갈려 서로 ‘치고받은’ 사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때 금실 좋은 부부였던 이 두 사람은 왜 철천지 원수로 변한 걸까. 불행의 씨앗은 이들 부부가 자녀 교육을 위해 위장이혼을 하면서 뿌려졌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서씨가 박씨를 만나 백년해로를 서약한 것은 1964년 11월. 이들 부부는 두 딸을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큰딸이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인 1980년 두 사람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딸들을 미국에 조기 유학을 보내기로 했던 것. 그러나 당시에는 해외여행도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던 때였고 조기유학이란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 부부가 어린 딸들을 미국의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쓴 편법은 바로 이민이었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은 서류상 이혼절차를 밟았고 그후 남편 서씨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교포 여성과 혼인신고를 했다. 그 결과 서씨는 두 딸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어린 딸들이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1년 만에 귀국해야 했던 것.
법적으로는 ‘남남’이었지만 이들 부부는 자연스럽게 다시 재결합했다. 하지만 1년여의 공백기로 둘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부부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2년부터. 부부가 과거에 사놓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과 마곡동 일대의 토지가 개발되면서 50억원대의 막대한 토지수용보상금을 받게 됐던 것.
돈벼락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걸까. 이들 부부 사이에 하나둘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돈의 사용처를 두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다 결국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됐던 것. 남편 서씨는 자신의 사업에 돈을 사용하려 했으나 부인 박씨는 이를 반대했다. 당시 토지는 부인 박씨의 명의로 돼 있었다. 서씨가 위장이혼 뒤 미국으로 가면서 남은 재산을 모두 부인 박씨의 명의로 돌려 놓았던 것.
그러나 박씨는 서씨에게 돈을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서씨는 1995년 법원에 재산분할청구소송과 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을 냈다. 동시에 서씨는 이혼무효 소송까지 제기했다. 서류상으로는 이혼 상태지만 사실상 결혼생활을 지속해 온 만큼 부부로서 공동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남편에게 횡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번엔 부인 박씨가 서씨를 상대로 고소에 나섰다. 남편 서씨가 갖은 방법으로 자신을 협박해 돈을 뜯어갔다고 주장한 것이다. 남편이 소송을 내자 자신도 맞불을 놓은 셈. 박씨가 소장에서 주장한 내용은 이랬다.
남편 서씨는 평소 가족들에게 자주 행패를 부렸는데 당시 다른 여자를 사귀던 중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해서 협의 이혼에 응했다는 것이다. 또한 귀국 후 서씨는 박씨와 두 딸과 함께 살지도 않았으며 돈이 필요할 때만 집을 찾았다는 것.
또 박씨는 “서씨가 자신의 회사 운영자금이 부족하다며 3억원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를 거절했더니 내 팔과 목을 비틀고 온몸을 때리다가 양주를 몸에 뿌려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등 폭행 및 협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서씨가 두 딸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뒤 LPG 가스를 틀어놓고 라이터를 들이대며 ‘10억원을 내놓지 않으면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 서씨의 주장은 달랐다. 부부의 동의 아래 자녀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간 것이며 귀국 후에도 같이 살았고 자신이 부인으로부터 받은 돈 13억원도 부인이 내어준 것이지 협박한 사실이 없다고 팽팽히 맞섰다.
양측의 주장이 너무나 엇갈렸기 때문에 법원은 할 수 없이 이들 부부의 큰딸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그러자 박씨는 딸에게 자신의 주장대로 증언할 것을 ‘지시’했다. 큰딸은 법정에서 어머니의 주장에 따라 아버지에게 불리한 위증을 했다.
그럼에도 남편 서씨는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앞뒤 정황을 볼 때 부인 박씨와 큰딸의 증언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재판부가 판단했던 것. 게다가 큰딸은 항소심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고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증언을 번복했다. 박씨에게는 ‘미운 남편’이었을지 몰라도 딸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큰딸 서씨는 “아버지에게 너무한다는 죄책감이 들었다”고 진실을 고백한 이유를 밝혔다.
결국 박씨와 큰딸 서씨는 법정에서 허위사실을 말한 죄로 실형을 선고받게 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씨의 죄질이 불량하고 법정에서도 죄를 뉘우치지 않아 실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법원은 박씨와 큰딸 서씨가 도주의 우려가 없는 데다 가족간의 일이니 서로 원만하게 해결을 하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서 법정구속을 하지 않았다.
현재 이들 부부는 아직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어서 이번 다툼이 쉽게 끝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박씨는 법정에서 큰딸이 말을 바꾼 것에 대해 “딸이 아버지의 꾐에 넘어가 둘이서 짜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법정에서도 이들 부부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상대측의 주장을 반박하며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수십억원대의 돈 때문. 이 돈을 둘러싸고 이들 부부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나서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단은 박씨가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박씨와 서씨, 두 사람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소송을 취하하고 재산을 ‘법대로’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러나 법정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이미 마음의 생채기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여서 극적 화해는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편 법원은 두 사람이 제기한 몇몇 송사와 관련해 또 다른 숙제를 안고 있다. 위장이혼이 취소가 가능한 것인지 판단을 해야 하고, 이에 따른 소유권 이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또 공갈과 위증 혐의 등이 얽히고 설킨 형사 및 복잡한 가사·민사사건들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려야 한다.
꼬일 때로 꼬인 이들 부부의 악연에 대해 법원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결과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