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엇갈린 명줄처럼 그날 이후 선배와 후배의 처지도 극명하게 갈렸다. 후배는 살인피해자로 땅에 묻히고, 선배는 살인혐의자로 철창에 갇혔다. 의도적으로 후배에게 ‘농약 소주’를 먹인 것으로 의심을 샀던 것.
이후 벌어진 재판 과정은 ‘파란만장’했다. 선배는 ‘결백’를 항변했지만 1심 재판부(제주지법)가 내린 결론은 ‘유죄’. 살해 혐의로 징역 15년이 언도됐다. 하지만 최근 2심 재판부(광주고법)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체 무엇이 극과 극의 판결을 이끌어낸 것일까.
이번 사건을 통해 ‘지옥과 천당’을 오간 장본인은 제주에서 과수 농사를 짓는 배아무개씨(55). 그는 동업 문제로 다투던 마을후배 김아무개씨(사망 당시 46세)를 농약이 든 소주를 먹여 살해한 혐의로 지난 1년여 동안 법정에 서야 했다.
지난 10일 광주고법은 피해자 김씨의 자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사건이 아직 ‘종착역’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검찰이 고법의 판결에 불복, 상고를 해 배씨의 혐의에 대한 최종 판단은 대법원의 몫으로 넘어갔다.
과연 배씨는 법원까지 헷갈릴 정도로 ‘교묘한’ 살인자일까, 아니면 억울한 피해자일까.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피고 배씨와 피해자 김씨는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 두 사람은 중학교 선후배 사이로 같은 동네에서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이웃사촌이기도 했다.
2002년 2월께 배씨와 김씨는 의기투합해 동업을 결심한다. 공동으로 탱자나무를 재배해 여기에 감귤을 접목시킨 후 팔아 그 수익을 절반씩 나누기로 한 것. 김씨는 자신의 집 뒤편 2백50여 평의 텃밭을 제공하고 배씨는 탱자나무 묘목 2천5백 본을 구입했다. 그러나 동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접붙인 감귤 대부분이 말라 죽었고 이후 관리도 제대로 안됐던 것.
그렇게 1년여가 흐른 2003년 4월12일 배씨는 후배 김씨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다른 사람과 동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탱자나무 묘목 관리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벌였다.
다음날인 13일 오후 6시께 배씨는 김씨와 화해할 목적으로 경운기를 타고 김씨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화해의 술자리’는 이내 ‘죽음의 굿판’이 되고 말았다. 배씨와 김씨가 같이 소주를 나눠먹자마자 김씨가 사망하게 된 것. 소량의 소주를 마셨던 배씨 또한 김씨가 쓰러진 잠시 후 고통을 호소하며 의식을 잃었다.
경찰 조사 결과 사건 현장에 남겨진 소주에선 ‘메○○’라는 맹독성 농약이 검출됐다. 문제는 누가 왜 ‘농약 소주’를 내놨는가 하는 점이었다.
수사를 맡았던 경찰은 당시 집에 있었던 김씨의 두 아들(중학생과 초등학생)의 진술 등을 근거로 배씨가 경운기에서 들고온 소주를 마시고 김씨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한 경찰 수사관은 “배씨가 김씨에게는 커피잔에 소주를 따라주고 배씨 자신은 소주잔에 따라 마셨다. 배씨도 평소 술을 좋아하는 편인데 김씨가 주는 큰 잔을 거부하고 작은 잔에 마셨다”며 배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검찰은 이 같은 경찰 수사 결과를 토대로 배씨를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처음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예고된 상태였다. 배씨가 워낙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하는 데다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물증 또한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소주를 마신 직후 김씨는 고통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고 소량을 마신 배씨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후 배씨는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검찰측과 배씨의 주장은 팽팽히 맞섰다.
검찰측은 “배씨가 소주를 마시는 시늉만 하고 바로 뱉었고 한 달 후 건강하게 퇴원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쇼’를 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배씨는 “나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면서 강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1심 재판부는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배씨가 경운기에서 소주를 가져왔다”는 김씨 아들들의 진술 ▲배씨가 작은 잔으로 술을 마신 데다 술잔을 입에 대기만 한 점 ▲당시 소주에 섞인 메○○ 농약이 김씨의 집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배씨의 집에서 다량 발견된 점 등을 들어 배씨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배씨측은 즉각 항소했고, 항소심은 1심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배씨 변호인측이 몇 가지 의문에 불을 당겼기 때문이었다.
가장 논쟁이 됐던 부분은 배씨의 살해 동기였다. 배씨측은 문제가 된 탱자나무는 구입가격이 전부 합해서 15만원에 불과했고 현재 김씨의 텃밭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시가로 팔아도 20여만원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배씨가 농지와 임야 4천여 평을 소유하고 있고 이 사건 직전 개인주택을 신축하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서 평소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김씨를 소액의 탱자나무 때문에 살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배씨가 정말 김씨를 살해할 마음이 있었다면 배씨 자신도 농약이 든 소주를 마셨겠는가 하는 점을 들었다. 배씨도 사건 후 농약 중독으로 병원에서 ‘소생불능’의 판정을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김씨를 살해할 목적이었다면 그 자신이 술을 마셨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검찰측은 배씨가 소주잔에 입만 댔다고 반박했지만 법원은 “메○○ 농약이 고독성의 물질이지만 소주에 희석된 상태에서 입만 대는 것으로는 소생불능의 판정을 받기 어렵다”며 배씨의 손을 들어줬다.
배씨측은 김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메○○은 살충제의 한 종류로 농가에서 흔히 비치하고 있어 김씨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농약이라는 것. 이 점에서 재판부는 김씨가 평소 자살할 결심으로 소주에 농약을 섞은 것을 준비해 놓았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 근거로 김씨가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신세를 질 만큼 술을 즐겨 아내가 가출한 상태였고 1억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어 가정형편이 어려웠다는 점을 들었다.
게다가 집 문제도 복잡한 상태였다.현재 김씨가 살고 있는 집은 김씨 부친의 명의로 돼 있지만 사실상 김씨의 형에게 증여된 상태. 그런데 최근 다른 사람에게 집이 팔려 김씨 가족은 집을 비워주고 이사해야 할 입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김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는 “밥을 먹지 못하겠다”며 매일 술을 마시며 주변 사람들에게 신세를 한탄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위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김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데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판단력까지 저하된 상태에서 자살할 생각으로 소주에 농약을 섞어 가지고 있다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고의나 실수로 배씨와 함께 이를 마시게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외에도 재판부는 1심에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된 김씨 아들들의 진술을 채택하지 않았다. 김씨의 두 아들이 배씨가 경운기에서 소주병을 가지고 온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만 술병을 든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점, 그리고 배씨가 현관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간 게 극히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김씨의 아들들이 진술을 바꾸면서까지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 것으로 봤다.
배씨는 과연 지난 1년여 동안 억울한 살인 누명을 썼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피해자 김씨가 ‘농약 소주’의 원주인인 셈인데 그는 왜 배씨와 함께 이 위험한 술을 나누려 했을까.
검찰과 변호인의 ‘진실 공방’ 한켠에선 또 다른 의문부호가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