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객의 돈을 유용한 후 살해한 용의자 김씨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
그러나 김씨는 살인 후 완전범죄를 노려 엄씨의 사체가 부패할 때까지 자신의 승용차 트렁크에 넣어두고, 인적이 드문 야산에 유기하는 등 치밀하게 자신의 범행을 은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엄씨의 사체가 심하게 부패돼 신원 파악이 어려운 가운데 자칫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으나 경찰의 집요하고 과학적인 수사로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2002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주역 근처의 사창가, 속칭 ‘황오동’에서 윤락업소를 운영하던 엄씨는 김씨가 다니던 한 은행에 3억5천만원을 맡겼다. 김씨는 엄씨가 무학에, 금융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엄씨에게 “자산관리를 해주겠다”며 접근했다. 홀로 험한 일을 하고 있던 엄씨는 김씨의 친절에 자신의 통장과 도장, 비밀번호까지 가르쳐 주는 가까운 사이가 됐고, 김씨와 엄씨는 자연스럽게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다.
엄씨와 함께 ‘황오동’에서 영업을 했던 한 업주는 “김씨와 엄씨는 드러내놓고 만나는 사이였다. 전에는 돌아가신 엄씨의 모친 제사를 김씨와 엄씨가 함께 지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업주에 따르면 엄씨가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해 나중에는 엄씨가 김씨에게 “결혼해서 같이 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의 관심은 오직 돈뿐이었다. 김씨는 엄씨의 계좌를 양도성예금으로 전환하고 20여 차례에 걸쳐 현금을 유용하는 등 모두 1억여원을 횡령했다. 그럼에도 엄씨는 배운 것 많고 명문대를 나온 김씨가 자신의 돈을 불려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해 8월 은행 자체감사에서 김씨의 횡령 사실이 적발됐고 엄씨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엄씨는 “빨리 내 돈을 갚아라” “우리 사이를 은행에 얘기해 회사 못 다니게 하겠다”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엄씨는 “돈을 갚지 못하겠거든 병든 아내와 이혼하고 나와 결혼하자”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김씨는 지난해 11월14일 오후 7시쯤 “식사나 같이하자”며 엄씨를 불러냈다. 엄씨와 같이 식사를 한 김씨는 “드라이브나 하자”며 엄씨를 유인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1시께 경주시 황성동 유림숲 앞 도로변에서 차를 세운 뒤 ‘일’을 벌였다. 엄씨의 머리채를 잡고 승용차 조수석에 짓눌러 질식케하여 살해했던 것.
범행 후 김씨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엄씨의 사체를 모포로 덮어 차 안에 10일간 방치해 부패시켰다. 그런 후 엄씨의 사체를 인적이 드문 야산 계곡 낭떠러지에 유기하고 엄씨의 혈흔이 묻은 승용차의 시트를 모두 새 것으로 교체했다. 또한 김씨는 자신의 또 다른 내연녀 이강자씨(가명·42)와 짜고 사건 당일 자신이 이씨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리바이를 조작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완전범죄란 없는 법. 엄씨가 피살된 지 한 달여가 흐른 지난해 12월16일 등산객에 의해 엄씨의 변사체가 발견되고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발견 당시 사체는 심하게 부패돼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사건을 맡은 경주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변사체의 부패가 심해 사인과 신원을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변사체 발견 며칠 후 ‘황오동’ 업주들이 이웃 업주인 엄씨의 실종신고를 했다. 다행히 엄씨의 실종 당일 인상착의와 변사체의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는 급물살을 탔고 경찰은 자연히 엄씨와 내연관계를 유지해왔던 김씨를 주목했다.
그러나 물증이 없었다. 경찰은 “엄씨가 숨지기 전까지 김씨와 함께 있었다는 정황이 확실했지만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김씨가 자신의 혐의를 강하게 부인해 정말 (수사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사건은 제자리에서 맴도는 듯했고 경찰은 탐문수사, 통신수사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증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지난 1월 초 경찰은 김씨가 얼마 전 승용차 시트를 교체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경주 일대 폐차장을 수색해 엄씨의 혈흔이 묻은 승용차 시트를 찾아냈다. 김씨의 완전범죄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한 수사관계자는 “김씨가 말다툼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하나 범행수법이나 은닉과정을 보면 김씨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김씨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내 뒷바라지를 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 엄씨의 돈에 손을 댄 것 같다. 가정과 직장, 딸 아이까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겠나. 그래도 내연녀를 둘씩이나 두고 살인까지 저지른 김씨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