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1일 오후 6시쯤 A원장은 병원업무를 마치고 막 퇴근하려던 순간 낯선 불청객의 방문을 받았다. 30대 중반에 건장한 체격인 이 남자는 몇 장의 사진을 트럼프 카드 다루듯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보였다. “아무거나 한 장 뽑아보세요”라며 그는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A원장은 처음 보는 남자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면서도 그가 하라는 대로 사진 하나를 뽑았다. 놀랍게도 사진에는 A원장 자신이 전혀 모르는 한 젊은 여자와 나체로 뒹굴고 있었다. 어쩌면 성행위를 연출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A원장이 너무 놀라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A원장은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자신이 처음 보는 여자와 낯선 곳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전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혹시 “합성된 사진이 아닐까”했지만 너무도 깨끗한 사진이라 A원장은 그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수십년간 쌓아놓은 명성이 한꺼번에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이 낯선 남자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는 A원장에게 “지역에서 사회활동도 많이 하는 사람이 왜 이런 일하고 다니느냐”며 “3억원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주변에 알려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 이후 이 낯선 남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협박전화를 해왔고 A원장의 가족관계까지 거론하면서 압박했다.
경찰수사결과 이 황당한 사건은 A원장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직폭력배 김아무개씨(30)가 연출한 사기극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을 맡은 대전 둔산경찰서에 따르면 A원장이 한 지인으로부터 고향후배라고 소개받은 김씨와 자주 어울린 것이 화근이었다. 김씨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소위 ‘기도’로 행세하고 있었지만 A원장은 김씨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것만 알았지 그가 대전지역 한 폭력조직의 행동대장인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경찰이 전하는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올 초 A원장은 김씨가 일하는 업소에 자주 드나들다 김씨에게 “유흥주점 하나 차려주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의했다. 이 말에 솔깃한 김씨가 “술집만 차려주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돈만 투자해 달라”고 반색을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지만 점포 계약을 앞두고 돌연 A원장이 마음을 접어버렸다. 대전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사회 활동도 많이 하는 소위 지역명망가인 자신이 술집을 운영한다는 것이 끝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몫 챙기려는 심산으로 열심히 사업을 준비했던 김씨는 계약 성사를 눈앞에 두고 A원장이 마음을 돌리자 이때부터 앙심을 품고 사기극을 모의했다.
김씨는 자신의 친동생을 A원장의 운전기사로 취직시키고 A원장의 가족관계와 주변사항을 몰래 수집했다. 물론 A원장은 자신의 새 운전기사가 김씨의 친동생이란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러던 지난 8월29일, 김씨는 대전시 둔산동의 한 술집으로 A원장을 불러냈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김씨는 A원장에게 양주 세병을 집중적으로 마시게 해 A원장이 술에 곯아떨어지자 미리 대기시켜놓은 ‘꽃뱀’ 정아무개씨(27)를 불렀다. 정씨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A원장을 근처 모텔로 데리고 가 옷을 모두 벗기고 성행위 장면을 연출했고 김씨는 이를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김씨는 자신의 친한 선배 김아무개씨(33)에게 사진을 주며 A원장을 찾아가 협박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선배 김씨가 바로 A원장을 찾아가 협박한 불청객이었다.
선배 김씨는 A원장에게 공중전화를 이용해 수시로 협박전화를 하며 “당신 정도면 3억원은 돈도 아니지 않느냐” “섣불리 경찰에 알릴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난 전국구다. 경찰도 나를 찾지는 못 한다”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A원장은 결국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경찰의 집요한 수사로 김씨 일당은 검거됐다.
사건을 맡은 둔산경찰서 김종윤 경사는 “범인들이 서로 연락할 때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아 수사에 애를 먹었다. 김씨 일당이 돈을 가져오라는 곳에 돈을 놓아두고 잠복 수사한 끝에 검거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 경찰 수사로 자신이 믿었던 김씨가 꾸민 사기극이라는 것을 알고 A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A원장은 그 동안 이런 사정도 모르고 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또한 착실히 자신을 잘 따르던 김씨가 조직폭력배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 경찰은 “A원장이 충격이 컸던지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중”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김씨는 자신의 범행을 반성하기는커녕 억울해했다. 김씨는 경찰진술에서 “먼저 원인을 제공한 것은 A원장이었다. 술집만 차려주면 내가 다 관리해주고 큰 돈을 벌어다주겠다고 했는데 A원장이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버렸다”며 “평소 자신이 돈 많다고 자랑만 하고 다녀 못마땅했다”고 털어놨다.
지역 명망가였던 유명병원장의 빈말 한마디가 결국은 패가망신의 시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