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단순 사기 사건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전과 4범인 한씨의 이번 사기극은 현지 취재 결과, 훨씬 더 대담했고 상식을 뛰어넘는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한씨의 거짓말에는 미국과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까지 오르내렸다.
또한 한씨는 체포되기 직전까지 부산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3~4명의 여성들과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여성들은 한씨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한씨가 성경을 따로 해석해 만든 교본으로 공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기꾼 한씨는 사실상 교주 행세까지 한 셈이다. 엽기적인 한씨의 행각을 추적했다.
지난해 4월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모 호텔 커피숍. 이 자리에는 부산 소재 해양 플랜트 설계 제작업체인 K사 대표 김아무개씨와 그의 고등학교 후배인 우아무개씨가 자리했고 그 맞은편에는 중년의 한 남녀가 앉아 있었다. 우씨는 김씨에게 “앞에 계신 한아무개씨는 미 CIA 동아시아 담당관이자 미합중국 외교협의회 극동지역 총재이고, 그 옆은 한씨의 부인이자 마취과 전문의인 장아무개씨”라고 소개했다.
김씨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고교 후배인 우씨가 “해외 펀드 유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과 연결해 주겠다”며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씨는 자신을 한씨의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했다.
한씨는 김씨에게 “미국 CIA가 후진국의 검은 자금을 좌지우지한다”며 “CIA가 힘을 써서 보통 30조원을 펀드회사를 통해 국내에 유입시킨다”고 말했다. 또 “펀드 자금을 지원받으려면 회사가 국내 5백대 기업의 매출 규모이면 좋겠고 해외 펀드 자금이 최소한 1천억 이상, 리베이트는 10%를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사실 이야기 내용도 황당했고 김씨가 운영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한씨가 제시한 조건에 해당하는 기업도 아니었지만 사업 자금이 필요했던 김씨에게 이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결국 김씨는 한씨로부터 1천억원 상당의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한씨는 펀드 자금을 받으려면 실무팀을 구성하고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며 초기 자금으로 3억원을 요구했다.
두 달 후인 6월 중순경 김씨는 장씨의 계좌로 우선 1억원을 송금했다. 그 후 12월까지 각종 경비와 로비 자금 등의 명목으로 김씨가 한씨에게 건넨 금액은 모두 14억4천만원. 그러나 한씨를 만난 이후 8개월이 지났지만 해외 펀드 자금 유치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김씨가 재촉을 할 때마다 한씨 측은 ‘펀드 회사에 문제가 있다’ ‘미국 출장중이다’라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기였던 것이다. 김씨가 운영하던 K사는 한씨에게 피해를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도를 맞았고 지난 1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됐다.
피해자 김씨는 경찰에서 “처음에는 의심이 들어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한씨가 CIA 관계자로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신분 공개를 꺼려해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는 김씨뿐만이 아니었다. 김씨가 한씨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남의 모 조선업체 사장인 문아무개씨(50)를 소개해 준 것. 문씨는 한씨가 미심쩍었지만 한씨와 함께 나온 이아무개씨 등이 “내가 책임지겠다”며 한씨의 신분을 보증하는 바람에 믿고 3억원을 건넸다가 역시 사기를 당했다.
이씨는 부산 모 대학의 사회교육원 강사 출신으로 한씨의 아내 행세를 한 장씨의 동료이기도 했다. 기자가 이 대학의 사회교육원에 직접 확인한 결과, 이씨와 장씨가 2년 전 계약직 강사로 있었던 사실은 확인됐다. 이번 사기 사건의 시작도 이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한씨의 내연녀로 알려진 장씨는 이씨에게 “해외 펀드 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는데 아는 기업이 있으면 소개하라”는 말을 여러 번 했고 이에 이씨가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인 우씨에게 이 같은 말을 전했던 것.
사기 행각을 벌인 한씨의 입에서 거론된 직책과 인사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면 그가 얼마나 대범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을 미 CIA 동아시아 담당관으로 사칭한 그는 국내 여당의 실세는 물론 미국 상원의원의 이름까지 줄줄 대는가 하면 미국 명문대학 총장의 직인이 찍힌 학위를 위조해 피해자들은 물론 측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피해자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한씨가 자신을 미국 대통령의 양아들이라고 했고 우리나라 대통령의 친서라며 서류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알고 보면 이번 사기에 동참한 장씨도 처음에는 한씨에게 당한 셈”이라고 전했다. 장씨는 3년 전 지인의 소개로 한씨를 만났다. 한씨는 장씨에게 “나는 미국 시민권자다. 특수공무를 수행중인데 5년 동안 한국에 파견 나온 것”이라고 했다. 또 한씨는 미8군 전용기를 타고 한국과 미국을 오간다고도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믿었던 장씨는 한씨와 동거를 시작했고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다는 것.
하지만 장씨의 행동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결혼 말이 오고갈 무렵 장씨는 한씨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남동생을 통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사기극을 함께 꾸몄다는 사실이다. 장씨의 남동생이 누나로부터 소개받은 한씨가 못 미더워 뒷조사를 해본 결과, 한씨가 오래 전 미군무원으로 일한 적은 있으나 CIA 담당관 등의 신분은 다 거짓이었음을 알아냈던 것.
구속된 한씨는 지금까지도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는 “CIA 관계자를 사칭한 일이 없다. 다만 해외 펀드 자금은 한 아랍 왕국으로부터 받아 지원해주려고 했으나 김씨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차질을 빚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피해자들에게 “5천만원을 줄테니 합의해 달라”며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견 기업인들이 한씨의 어이없는 사기 행각에 걸려든 이번 사건에 대해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각국의 정보기관 관계자는 비밀요원으로서 어떤 일이든 다 가능하다고 믿는 모양”이라며 “자금난에 시달리다 보니 한씨의 제안에 솔깃했던 듯하다”고 말했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