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 여대생 김 씨에게 당한 피해 사례와 증거물 등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했다. | ||
경찰과 피해자들에 따르면 서울 모 대학 일문과 휴학생인 김 아무개 씨(24)는 인터넷 직거래 장터 등에서 시중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판다는 말로 구매자들을 끌어모은 뒤 돈을 받고 잠적하는 수법으로 사이버 사기극을 벌여왔다.
김 씨는 구매자가 판매자의 통장으로 직접 돈을 입금한 뒤 물품을 받는 온라인 직거래 장터의 특성을 악용, 여러 직거래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교묘한 사기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신용으로 운영되는 온라인 장터를 들쑤셔놓은 것도 모자라 기발한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또 다른 사기극의 용의자로 만드는 등 범행수법이 악랄해 피해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인터넷 직거래 장터는 수수료가 들지 않는다는 점, 번거로운 절차가 없고 빨리 물품을 받을 수 있다는 점,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희귀 명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 급매물이 많은 만큼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 가격절충이 가능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몇 해 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중간에서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조율할 수 있는 책임운영자가 없어 거래의 안전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즉 입금을 하고 난 후 택배나 퀵서비스로 물품을 건네받는 거래 방법상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한 셈. 사기 피의자 김 씨는 바로 이 같은 온라인 직거래 장터의 허점을 파고들어 지난 3년간 다양한 이름으로 행세하며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지난해 9월 회사원 A 씨(22)는 자주 방문하던 직거래 사이트를 둘러보던 중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명품 가방을 발견했다.
‘정품 버버리 버켓백입니다. ○○백화점에서 구매했구요, 숄더용이에요. 두 번밖에 들지 않아 상태는 흠집이나 스크래치 전혀 없는 거의 새 제품입니다. 당연히 더스트백이랑 개런티카드 있구요. 구매했을 때 받아둔 영수증도 있어요. 구입가가 49만 원 정도였는데 아주 저렴하게 내놓습니다. 16만 원에 판매할게요. 사이즈는 30×28×16으로 사계절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성 있는 가방입니다. 메일로 연락처 남겨주세요.’
판매자는 위와 같이 상세한 물품 설명과 함께 직접 찍은 제품 사진도 같이 올려놓았다. 아무리 중고라지만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제품을 파격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생각에 A 씨는 판매자에게 구매의사 메일을 보냈고 몇 시간 후 판매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제품에 대한 추가 질문에 판매자는 ‘○○님’이라는 존칭을 깍듯이 붙여가며 친절히 설명했고 A 씨가 구매의사를 밝히자 통장계좌번호를 알려주며 입금을 부탁했다. 이미 직거래 경험이 있었던 A 씨는 아무 의심 없이 ‘빠른 배송’을 부탁하며 즉시 돈을 보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물품은 도착하지 않았다.
속이 탄 A 씨는 판매자에게 전화를 했고 그때마다 판매자는 ‘며칠만 기다려달라’ ‘우체국에서 등기번호를 알아보겠다’ ‘반송 중인 것으로 나왔다’ 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그래도 물품은 오지 않았고 급기야 판매자의 전화와도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판매자는 ‘어머니가 아프시다’ ‘시댁에 와 있다’ ‘남편이 사고를 당해 입원했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갖은 핑계를 댔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판매자는 어느 순간 휴대폰을 끊고 잠적해버렸다.
예의 판매자는 바로 사기 피의자 김 씨였다. 김 씨로부터 A 씨와 흡사한 피해를 당한 이들은 부지기수로 현재 정확한 인원조차 파악이 안 될 정도다. 피해자들이 더욱 분노하는 것은 피해자를 사기 용의자로 만들어버리는 김 씨의 질 나쁜 범행수법 때문이다.
▲ 피해자들이 인터넷 카페에 올린 ‘사이버 사기꾼’ 여대생 김 씨의 사진. | ||
속았다는 느낌에 B 씨는 고소까지 운운하며 거칠게 환불을 요구, 간신히 자신의 통장으로 75만 원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B 씨는 ‘사기 혐의로 고소가 들어왔으니 출석하라’는 경찰의 통지를 받아야 했다. 조사 결과 김 씨에게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자신이 구입할 물건값인 줄 알고 B 씨의 계좌로 송금을 했던 것이다. 즉 김 씨는 다른 피해자에게 B 씨의 계좌를 자기 것인 양 알려주고 입금토록 했으며 B 씨는 그 돈을 김 씨가 환불해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 씨는 입금을 요구한 뒤 잠적하는 수법 외에도 여러 명의 구매자들을 상대로 일명 ‘돌려막기’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이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피해자들은 자신이 입금한 계좌의 주인이 실제 판매자인 줄 알고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 피해자가 졸지에 사기꾼이 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사건은 복잡해졌고 피해자들이 사건을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늘어나 경찰 수사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엽기적인 사기꾼의 정체는 의외로 쉽게 드러났다. 직거래 사이트에서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를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피해 사실에 대해 얘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범인이 동일인물 즉 김 씨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피해자들과 경찰에 따르면 사기행각을 벌인 김 씨는 서울 모 대학 휴학생으로 15개 정도의 직거래 사이트를 무대로 일명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이용해 브레이크 없는 사기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는 이미 사기죄로 징역 8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는가 하면 집행유예 기간 중에도 같은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여 실형을 살기도 한 전문 사기꾼이었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씨는 화장품과 가방, 육아·출산용품 등에 관심이 많은 20대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또 구매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30대의 주부 행세를 하며 갖은 존칭을 써가며 친근하게 접근했다. 또한 자신이 시댁에 매여 사는 처지임을 강조하면서 아기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며 문자로 연락을 취하고 ‘연락이 늦어 죄송하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아기엄마라는 이 상냥한 여성이 사기꾼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 씨가 사이트에 올려놓은 물품 사진은 모두 도용된 사진일 뿐 물품은 애초부터 없었다. 구매자들이 입금을 하면 여러 가지 핑계로 시간을 끌다가 어느 순간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것이 김 씨의 전형적인 수법.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 계좌번호까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김 씨와 연락두절 상태였다는 게 피해자들의 진술이다. 하지만 얼마 후 김 씨는 또 다른 사이트에서 흡사한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짓을 수년째 반복,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해왔다는 것.
피해자들과 경찰에 따르면 김 씨가 인터넷 직거래장터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4년 무렵. 당시 김 씨가 한 명당 적게는 몇십만 원에서 100만 원대까지 70여 명을 상대로 챙긴 금액만도 2000만 원에 달했다. 하지만 김 씨는 그뒤로도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수법으로 범행을 계속해왔다. 피해자들은 김 씨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 1000여 명에 달하며 피해액은 억대를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인터넷상에는 김 씨의 신상과 얼굴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이고 김 씨가 휴학 중인 학교와 관련 학과, 교수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김 씨를 추적해왔다는 일부 피해자들은 김 씨가 사기행각으로 챙긴 돈으로 성형수술을 하고 남자친구와 연애행각을 벌이는 등 피해자들을 농락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김 씨가 전문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다시 반복된 김 씨의 사기행각에 누구보다도 망연자실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 씨의 아버지였다. 김 씨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딸의 전력을 상세히 알고 있는 상태였는데 김 씨는 원래 돈을 물 쓰듯 쓰는 습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즉 딸이 2003년 대학에 입학한 뒤 아무 계획 없이 함부로 빚을 내 돈을 쓰고 그것을 막으려다 보니 범행에 눈을 돌리게 된 듯하다는 것.
이미 밝혀졌다시피 김 씨의 사기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 씨의 아버지는 이미 두 차례나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김 씨가 잇따라 사고를 치자 김 씨의 아버지는 집을 팔아 피해금액을 변제하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비용을 감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 문제로 가정불화 끝에 이혼까지 하게 됐다는 것. 한마디로 김 씨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 셈이었다. 현재 김 씨의 아버지는 피해자들에게 변제할 의사를 보이고는 있지만 속속 드러나고 있는 엄청난 피해액에 막막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김 씨에 대한 크고 작은 피해사례를 접수받은 경찰 역시 김 씨의 사기행각이 이 정도 규모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반응이다. 그동안 개별 피해액이 비교적 소액인 데다 피해자들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어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누적 피해액수와 피해자의 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전해지면서 급기야 경찰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 2일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김 씨에 대해 전국에 13건의 지명수배가 내려진 사실을 파악, 전담반을 꾸려 수사에 나섰다.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 지 사흘 만에 꼬리를 잡힌 김 씨는 “명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며 고개를 떨궜다. 3년 동안 수많은 인터넷 상거래자들을 상대로 한 간 큰 여대생의 신출귀몰한 사기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