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방 도우미를 잔인하게 살해했던 범인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감춰졌던 다른 범행들까지 드러났다. | ||
김 과장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고통 때문이었는지 억울함 때문이었는지 눈도 못 감고 죽은 피해 여성의 사체를 본 순간 우리들은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면서 “짧은 생을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허덕거리며 살다 살해된 한 여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형사들이 43일 동안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사를 진행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004년 8월 3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보자에 따르면 “○○번지 지하 셋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심하게 난다. 인기척도 없고 세들어 사는 여자도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형사들이 반포동의 한 지하방에 도착했을 때 방 안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역한 냄새가 새어나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직감한 형사들은 다급히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형사들은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얼굴을 돌려야 했다.
방 안은 온통 피바다였다. 방 한 구석에는 한 여성이 가슴에 칼이 꽂힌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이곳저곳에 흥건한 핏자국들이 참혹했던 사건 당시를 말해주고 있었다. 서초서에 근무할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김 과장의 회고.
“방문을 여는 순간 피비린내와 시체썩는 냄새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사체를 살펴보니 이미 심하게 부패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온통 구더기가 기어다니고…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피해 여성은 32세의 마 아무개 씨. 수년 전 이혼한 마 씨는 서초동 일대의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변을 당했던 것이다.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던 불쌍한 여인이었다. 결혼생활도 불행했는데 결국 실패, 이혼 후 외롭게 살다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다 썩은 시체로 발견됐으니 이보다 더한 팔자가 어디 있겠나. 장례를 치러줄 사람조차 없었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면서 1시간에 3만 원씩 받아 생활해왔는데 마 씨를 찾는 손님도 거의 없어 수입도 변변치 못했다고 한다. 마 씨의 딱한 형편을 알고나니 범인을 빨리 검거해야겠다는 생각에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었다.”
즉시 수사전담반이 편성돼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원한 관계로 인한 살인 가능성. 범인은 피해자 마 씨의 가슴 부위를 집중적으로 난자했는데 무려 일곱 군데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살해 의도가 다분했다. 특히 마 씨의 가슴에 커다란 부엌칼이 그대로 꽂혀 있던 것으로 보아 범인이 피해자와 원한 관계에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경찰은 마 씨의 가족과 지인, 주변인물을 중심으로 일차적인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또 생전에 마 씨와 치정이나 채무 관계로 갈등을 빚은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 씨에게는 사귀던 애인이 있었는데 집안의 격렬한 반대로 두 사람의 교제가 원만히 진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두 사람 간 남모를 갈등이 있었거나 다툼 끝에 살인이 일어났을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마 씨의 애인에게서도 아무런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사건 현장에 지문이나 족적, 머리카락 등 범인을 단정지을 수 있는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어지는 김 과장의 설명.
“사체에 꼽힌 흉기에서도 범인의 지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범인은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후 빈틈없이 현장을 정리한 후 유유히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기가 막힌 것은 범인이 자신의 발자국은 남기지 않은 대신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245㎜ 치수의 여성용 슬리퍼를 신고 다니며 일부러 족적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초범이 홧김에 저지른 우발범행이었다면 범인은 뒷수습은 생각지도 못한 채 다급히 현장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상 범인은 상당히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로 강도강간 전력이 있는 인물일 거라는 판단이 섰다.”
김 과장은 사건 현장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다시 수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한쪽 벽면에서 피해자 마 씨의 혈흔이 아닌 O형의 혈흔을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부엌칼로 사물을 아주 세게 내려찍다보면 그 충격으로 손이 칼자루 밑의 칼날에 닿게 마련이다. 난 직감적으로 가해자가 마 씨를 마구 찌르는 동안 그 반동으로 자기 손에도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그 피가 벽면에 묻은 거라고 판단했다. 현장에 자신의 지문을 비롯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범인은 완전범죄를 확신했을 테지만 벽 한켠에 묻어 있던 미세한 혈흔까지 찾아낼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흔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던 수사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전담반 형사들이 밤낮없이 뛰는 사이 어느새 추석이 다가왔다. 김 과장은 추석 당일 새벽 막걸리와 과일, 오징어 등을 사서 마 씨가 살해된 현장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눈도 못 감고 죽어 있던 마 씨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눈도 감지 못했겠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추석날 아침 마 씨 위령제를 지내줬다. ‘내가 범인을 꼭 잡아주마. 약속하겠다. 이곳에서의 한 많은 삶을 모두 잊고 편한 곳으로 가라’고 명복을 빌어줬다.”
김 과장은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마 씨의 주변인물들에게서 아무런 혐의점이 나오지 않자 그는 원한에 의한 면식범의 소행 대신 전문 강도강간범의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였다. 경찰이 주목한 것은 마 씨가 거주하던 집 일대에 유흥업소에 근무하는 여성들이 많이 산다는 점이었다. 형사들은 그간 이 일대에서 발생한 사건 중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린 강도강간 사건들을 일일이 분석, 동종 전과자와 비슷한 수법으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용의자를 좁혀 나갔다.
그 결과 김 과장의 레이더에 걸린 이는 강도강간 전력이 있던 강 아무개 씨(당시 29세). 강 씨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추적한 결과 그는 이 일대에서 강도강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강 씨는 해당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는 매번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거주지를 옮기는 등 수상한 행적을 보였다.
“우연일지 몰라도 마 씨의 집을 찾아가 넋을 달래준 뒤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려는 수사진의 노력을 마 씨가 알아줬나 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 씨를 용의선상에 두고 집중 수사를 진행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강 씨의 추가범행 흔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 수사결과 강 씨는 사건 당일 현장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그를 용의자로 지목할 만한 여러 정황들도 드러났다.
특히 강 씨는 마 씨가 살해된 현장에서 발견된 O형의 혈흔과 동일한 혈액형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간 발생한 여러 건의 강간사건과 관련된 정액 DNA 검사결과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수십 일 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던 마 씨 살인사건과 강간사건들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강 씨는 유흥업소에 다니는 여성들이 혼자서 많이 사는 서울 반포동과 논현동 일대를 주무대로 무려 15명의 부녀자를 강간하고 강도행각을 일삼아온 악마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김 과장과 팀원들은 휴대폰 위치추적을 토대로 충청도 일대의 낚시터와 여관 등을 일일이 뒤진 끝에 음성 인근에 은신해 있던 강 씨를 찾아냈다. 하지만 강 씨는 모든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의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더없이 중요했다.
“강간사건의 특성상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협조를 꺼렸다. 피해자들로서는 악몽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것이기에 강요할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는 게 김 과장의 얘기. 하지만 형사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 피해 여성 중 술집에 나가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김 과장은 그 아가씨를 붙잡고 설득전을 벌였다. 몇날 며칠을 매달린 끝에 피해여성의 협조를 얻어 대질까지 한 결과 강 씨로부터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증거가 확보됐지만 강 씨는 무조건 범행을 부인했다. 시치미를 떼고 모르쇠로 일관하는데 당시에는 정말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더라. 그래서 현장에서 채취한 혈흔과 DNA 검사 결과를 들이댔다. 또 피해 여성과 대질심문을 했더니 그제서야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범행을 줄줄이 자백하더라. 이로써 마 씨 살인사건은 물론이고 그동안 묻혀 있던 강간사건들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마 여인의 사체가 발견된 지 43일 만에 김 과장이 밝혀낸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서초구 일대에서 혼자 사는 여성들을 상대로 강도강간을 저질러온 강 씨는 사건 당일 오전 10시께 “도시가스검침을 나왔다”고 속이고 마 씨의 집에 침입했다. 강 씨가 가스 검침을 하는 척하며 범행 기회를 노리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던 마 씨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마 씨의 서른두 번째 생일날로 그녀는 친구들과 모처럼 한 점심약속으로 한창 들떠 있는 상태였다. 전화를 끊은 마 씨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 낌새가 보이자 강 씨는 다급해졌다. 흉기를 들고 마 씨를 위협, 강간하려던 강 씨는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항하자 흉기를 마구 휘둘렀던 것이다.
“강 씨는 살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범행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계획적이었고 잔인했다. 그는 범행 후 걸레로 지문과 족적 등을 일일이 닦아내고 마 씨의 슬리퍼를 신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일부러 허위 족적을 남기는 등 치밀한 연출을 했다. 또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곱 차례나 찔러 마 씨를 무참히 살해하고 보란듯이 칼을 꽂아두기까지 하는 지능범의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강 씨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 과장은 “한마디로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인물이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어쩜 사람의 겉과 속이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강 씨는 몇몇 직업을 전전하다 백수로 지내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강 씨는 평상시 마음도 여리고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주변 평판도 그랬다. 하지만 범행 당시에는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 강 씨가 그토록 흉악한 강간살인범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나. 핸섬한 외모에 애인까지 있었던 강 씨는 3명을 상대로 한꺼번에 강간을 하는 엽기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자기 애인에게는 수백만 원짜리 명품가방까지 사주며 호의를 베풀던 강 씨가 다른 여성들에게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치욕과 상처를 줬다는 것에 더욱 분노를 느낀다”며 울분을 토했다.
현장검증을 끝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짓던 날 김 과장은 한 달 반 만에 모처럼 발을 뻗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사건을 해결했다는 뿌듯함보다는 착잡한 기분이 앞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 씨에게 혼잣말로 ‘봐라. 내가 반드시 범인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했잖니? 외롭고 고달팠던 기억은 잊고 편안히 가라’고 말하는데 마음 한 켠이 어찌나 씁쓸하던지….”
피의자 강 씨는 살인 및 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돼 결국 무기형이 확정된 상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