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임직원들이 납품업체로부터 대규모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은 서울 삼성동 구 한전 사옥으로 한전은 지난 연말 나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일요신문DB
검찰에 따르면 K 사 김 대표는 지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한전과 한전의 자회사 한전KDN, 한국수력원자력 전·현직 임직원 10명에게 수주 청탁 대가로 3억 56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K 사는 김 대표의 이런 로비 노력 덕분(?)에 지난 2006년 설립된 신생 업체임에도 6년 동안 한전KDN을 통해 한전 배전센터 종합상황판 구축 사업 등 총 63건의 납품계약을 맺어 412억 원 상당의 장비를 공급할 수 있었다.
우선 김 대표는 협력업체로부터 마치 용역과 자재를 납품 받은 것처럼 허위 세금계산서를 받아 그 대금을 지불한 뒤 돌려받는 수법(가공거래), 친인척 등 실제 근무하지 않는 총 60명을 허위 직원으로 등재해 이들에게 급여를 지급한 뒤 돌려받는 수법(가공급여) 등으로 회사자금 약 39억 원을 횡령했다. 김 씨는 이같이 빼돌린 회사자금으로 한전, 한전KDN, 한수원 임·직원, 경찰간부 등에게 약 3억 5690만 원을 뇌물로 제공했다. 김 대표는 한전 측과 선이 닿아 있는 다른 IT업체 대표를 통해 로비 라인을 구축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김 대표는 동갑내기인 또 다른 IT업체 대표를 통해 한전과 그 자회사들에 선을 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뇌물은 받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맞춤형 금품으로 제공됐다. 현금, 수표, 법인카드뿐만 아니라 360만 원짜리 독일제 자전거, 시가 990만 원 상당의 고급 차량용 오디오, 고급 세단인 ‘제네시스’ 렌터카, 독일산 외제차인 ‘뉴비틀’, 로비 대상자 아들의 골프레슨비와 전지훈련비 등으로 백화점식 로비를 방불케 했다.
뇌물을 받은 12명 중 특히 주목할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이명박(MB) 정권 인수위원회 출신 인사인 강 아무개 씨이고, 나머지 한 명은 현직 경찰 간부인 또 다른 강 아무개 씨(경정)다. MB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 출신인 강 아무개 씨는 MB 정권에서 한전 감사에 이어 한국석유관리원 이사장까지 지내는 등 전형적인 ‘MB맨’으로 분류되는 인사다.
한전에서는 지난 2008년 12월부터 지난 2011년 1월까지 상근 상임감사위원(감사)을 지냈다. 강 씨는 납품기한 연장 등 한전 납품 사업의 원만한 진행을 도와달라는 청탁 취지로 K 사 김 대표로부터 현금 1500만 원과 퇴임 후 운행할 ‘제네시스’ 렌터카를 받았다. 한전에서 상임감사는 한전 및 자회사 임직원들에 대한 비위 감사, 일정 규모 이상 사업의 적법성 및 타당성을 검토하는 일상감사 등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며 사장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자리다. 특히 공기업 감사는 파워에 비해 업무 강도는 상대적으로 낮고 책임과 의무도 적지만 높은 연봉을 받는 자리라는 인식 탓에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넘버 원’인 기관장마저 부러워하는 자리로 통한다.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이번 수사에서 강 전 감사와 더불어 눈길이 가는 사람은 현직 경찰 간부인 또 다른 강 아무개 씨(강 경정)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장인 강 경정은 지난 2010년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은 K 사 김 대표로부터 38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의 검찰 관계자는 “강 경정과 김 씨는 2010년 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진행한 상이군경회 횡령 혐의 수사 당시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상이군경회는 한전으로부터 낡은 변압기를 받아 폐품 처리하는 수익사업을 해 왔는데 당시 경찰은 상이군경회 임직원들이 공금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하고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바 있다.
강 경정은 김 대표로부터 2010년 8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1년 5개월간 감찰·수사 청탁, K 사에 대한 감찰·수사 무마 명목으로 실제 근무하지 않았음에도 허위 직원으로 등록해 급여 3800만 원을 받았다. 강 경정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에 파견근무 당시 김 대표의 청탁을 받고 K 사의 경쟁업체 등에 대한 비위 첩보를 수집해 경찰청 특수수사과로 이첩하는 방식으로 경찰청 수사를 진행시키기도 했다. 강 경정은 지난 2008년 4월부터 2010년 8월까지 2년 4개월 간, 2013년 4월부터 2014년 2월까지 10개월 간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 특별감찰반에 파견 근무했다.
특히 강 경정은 순경 출신임에도 ‘수사통’으로 통하며 경찰 조직 내에서도 소위 잘나가는 인사였으며, 청와대 문건 유출 혐의로 구속된 박관천 경정과 일종의 라이벌 구도까지 형성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목을 끌고 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강 경정은 순경부터 시작했지만 간부후보생이나 경찰대 출신에도 밀리지 않고 오직 수사력 하나로 승승장구한 사람이다. 2000년대 초반 검·경합동수사본부에 배속돼 조직폭력배인 ‘장안파’ 일당 35명을 일망타진했을 당시 강 경정이 1년 넘게 노점상으로 위장해 조폭들을 탐문 수사했다는 일화는 전설같이 내려오는 이야기다”며 “또 다른 수사 에이스로 꼽히는 박관천 경정과 지난 2013년 청와대 파견 근무 당시 파견 경찰관 내 주도권을 잡으려고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기관 일각에서는 이번 한전 납품비리 수사가 구여권 실세를 겨냥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서울중앙지검에서 이번 한전 납품 비리뿐 아니라 MB정권에서 ‘낙하산 인사’로 논란이 된 바 있는 다른 공기업들과 관련된 로비 수사도 진행되고 있다”며 “전 정권의 인·허가 비리로까지 확산될 가능성까지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