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 8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증세를 하지 않고 복지 수준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46.8%로, ‘국가재정과 복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의견(34.5%)보다 12.3%포인트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법인세 인상 논란에 대한 재계의 공격적 방어가 국민 여론은 물론, 정치권과도 엇박자를 내고 있다. 전경련 산하 연구원은 최근 법인세 인상 시 간접비용이 66조에 달한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사진은 2011년 전경련 행사 모습.
이 같은 결과는 복지 확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기보다는, 연말정산 파동 이후 증세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서가 커진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현재 국민 정서는 세금이 늘더라도 어디에 쓰이는지, 공평하게 부과되고 있는지 조세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커져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어떤 세금을 올리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기업이 부담하는 법인세’를 올리자는 응답은 59.7%, ‘온 국민이 같이 부담하는 부가가치세’라는 의견이 23.0%, ‘개인이 부담하는 소득세’ 의견이 6.0%였다. ‘세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법인세를 올려야 한다’는 찬성 의견이 52.8%로, ‘경제에 부담이 되므로 법인세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 의견(22.9%)의 두 배를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불균형적인 소득세, 역진세 구조인 부가가치세보다 기업들의 법인세가 조세불신 정서의 타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법인세를 포함한 ‘기업 증세’는 현실화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법인세 인상 ‘절대불가’에서 “법인세도 성역화하지 않는다”고 한 발 물러섰고,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보편복지에서 선택복지로 전환하는 조건으로 부자 증세와 함께 법인세 인상 카드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정부의 기조가 완전히 증세 쪽으로 기울지 않은 데다, 여당 내에서도 법인세 인상에 반대하는 기류가 커 현실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법인세 인상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기업들에 대한 비과세·감면 혜택 축소나 기업소득환류세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사실상 기업 관련 세금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기업 증세’ 가능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재계는 “법인세를 올리면 기업 의욕을 꺾어 경제를 죽인다”는 기존 논리만 늘어놓으며 ‘공격적 방어’로 일관하고 있다. 대기업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5일 ‘복지 정책의 사회적 비용 추계’를 통해 복지 비용 증가를 법인세 인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할 경우 순수 복지 비용 외에 기업경기 위축에 따른 세수 감소·소비 감소·근로자 소득감소 등으로 ‘간접 비용’이 66조 45억 원이나 들어가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의 법인세 인상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간접 비용’은 기업이 법인세율 인상으로 자본소득이 줄어들고 생산을 축소함에 따라 기업이득, 근로자의 소득 등이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여전히 ‘법인세를 올리면 기업 의욕을 꺾는다’는 논리의 연장선상이다.
‘기업 증세’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전경련 신축회관 준공식 행사.
이날 한경연은 한국전력공사, 기업은행 등 공기업들이 쌓아둔 유보금이 67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고서도 냈다. 최근 정부가 민간기업의 배당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재무안전성이 비교적 높은 공기업들도 배당보다는 유보를 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기업들이 법인세율을 낮춰줘도(25%→22%), 투자와 배당을 늘리거나 임금을 올리지 않고 사내유보금만 늘려간다는 비판에 대한 반격이다.
마치 국민들의 조세불신,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이 미진한 데서 비롯된 반 기업 정서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태도다. 10대그룹에 속하는 대기업 관계자는 “개인 소득과 기업소득에 대한 과세 불균형에 대해서는 보고서가 많이 나와 ‘근로자는 배고프고 기업만 배불린다’는 인식도 팽배한 상황인데, 재계가 사회적 설득에는 소극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연합회 관계자는 “법인세 인상론이 불거질 때마다 기업들의 논리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면서 “정부도 법인세 인상에 반대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설득력 있는 논리와 근거를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인소득과 기업소득에 대한 과세불균형은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다. 한국의 ‘저부담-저복지’ 수준을 벗어나려면 고소득자, 대기업 우대의 조세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최근 ‘한국의 특수성과 한국형 복지국가’ 보고서에서 한국이 저부담-저복지 상태에 있는 이유로 과세형평성 문제를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소득자의 과세 비중이 작고 고소득자와 고액자산가에게 제공하는 비과세 감면 혜택이 큰 탓에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개인 소득세는 3.8%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8.5%)의 절반 이하였다. 고용주의 사회보장기여금은 GDP 대비 2.6%로 OECD 평균(5.2%)의 절반 수준이었다. 세제 혜택이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집중되면서 2011년 개인소득의 경우 과세자 상위 10%가 전체 소득공제액의 19.7%에 달했다.
다른 자료인 국세청의 ‘최근 5년간 공제감면세액 상위 1000대 법인의 법인세 신고현황’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지난 2013년 기준 상위 1000대 대기업이 전체 조세감면 혜택의 79%를 차지했다. 이 중 상위 10대 대기업의 조세감면 혜택 규모는 4조 2553억 원으로 46%를 차지하는 등 규모가 클수록 조세감면 혜택이 컸다.
특히 GNI(국내총소득)에서 차지하는 가계소득의 비중이 1975년 79%에서 2013년 61%까지 떨어진 반면, 기업소득은 9%에서 26%로 늘어났다. 가계보다 기업이 더 잘 살게 된 셈이다.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는 과세형평성을 위한 대안으로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와 법인세의 실효세율을 높이고, 상장주식과 파생상품의 양도 차익에 대해서도 과세해 조세체계의 누진성을 높일 것을 제안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