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역 앞을 지나는 시민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두 지역에 대한 각 선거 캠프의 열기와는 달리 정작 현지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서민층의 밑바닥 정서는 특히 더 심했다. “웬 선거?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다” “누굴 찍어줘 봐야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들 지역에서도 50대 이상 장년층과 30대 이하 청년층으로 각각 나뉜 이회창 후보 대 노무현 후보의 세대별 지지 성향은 뚜렷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PK는 ‘반 민주당’ 정서가 아직 대세를 이루고 있었고, 충청권 역시 침묵하는 대다수 부동층의 ‘대세’를 쫓는 보수적 성향이 감지됐다. 부산지역과 충청도의 표심은 과연 바뀌고 있는 걸까. 지난 11월29, 30일 양일에 걸쳐 두 곳의 민심을 훑어봤다.
[부산]
이회창, 노무현 양 후보측에서 사활을 걸며 지난 주말 대규모의 유세 공방을 벌인 PK(부산•경남) 지역. 하지만 정작 그 중심부에 있는 부산의 분위기는 냉담함과 무관심으로 채워져 있는 듯했다.
부산역 앞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택시기사 이아무개씨는 선거 분위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뜸 “서민들 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는데 선거는 무신 선건교? 찍어줘봐야 다 그놈이 그놈이제”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투표는 할 것이 아니냐’고 묻자 “박정희는 죽었고 전두환은 한 번 했으니까, 차라리 장세동이나 찍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대답했다.
부산의 냉랭한 분위기는 밑바닥 민심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 지역의 대표적 재래시장이 밀집되어 있는 남포동 광복동 주변의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등의 상인들은 ‘선거’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손사래를 치며 “장사가 안돼 죽을 지경”이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갈치시장에서 경매 일을 하는 정아무개씨(36)는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일하고 나면 소주 딱 한잔 걸치고 집에 가서 자기 바쁘다”며 “TV 뉴스나 신문 볼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찍어봐야 그사람이 그사람 30년째 생선을 팔고 있다는 50대 후반의 한 아주머니는 “선거 때만 되면 꼭 한번씩 여기 찾아와서는 표 달라고 굽신거리고, 선거 끝나면 코빼기도 안 내비치는 거이 어디 한두 번이가? 이젠 아무도 안 찍을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곁에서 생선 배달을 하던 50대 남성은 “노무현이가 우리 서민편이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부산에선 인심 얻기 힘들제.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오면 또 모를까”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부산의 저변에 뿌리내린 ‘반 민주당, 반 DJ’ 정서는 여전히 견고한 느낌이었다.
강아무개씨(61세)는 “어제도 사람들과 소주 한잔하면서 얘기했지만 노무현이가 여기가 고향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결국은 이회창이가 될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60대 초반의 택시기사 김아무개씨는 “노무현의 원래 부모 고향은 전라도라 카더만”이라며 “여기서 국회의원도 떨어졌는데 대통령은 택도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국제시장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50대 중반의 한 남성은 “아침 뉴스 보니까 정몽준이 하고 합의했다던데, 또 나눠먹기 하자는 것 아니냐? DJ하고 JP가 나눠먹기 해서 나라가 이 모양 이꼴인데, 또 그 판”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이가 똑똑하긴 하지만, 정몽준이가 발목 잡고 민주당이 가로막고 하는데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나? 독재는 아니라도 이번 대통령은 좀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게 필요하다”고 이 후보에 대한 지지 성향을 드러냈다.
대체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정서가 여전했지만 또 막상 이 후보를 확실히 찍겠다는 얘기도 듣기 힘들었다. 택시기사 이씨는 “어디 이 후보가 좋아서 지지하나? 민주당 비리를 파헤치려고 하면 한나라당밖에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지금까지 찍어준 거지”라고 대꾸했다.
▲ 노무현을 지지하는 젊은층의 성원이 이번엔 결실을 보게 될까. | ||
부산에서도 역시 젊은층 사이에선 노 후보 지지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 남포동 PIFF 광장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지금까지 지자체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는 한 번도 안했는데, 이번 대선에는 노 후보 찍기 위해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딸 둘을 둔 한 주부(37세 연산동)는 “TV 보니까 노 후보의 서민적인 풍모가 마음에 든다”며 “반면 이 후보는 어쩐지 웃음이 어색하고 좀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확실한 이회창 표도 드물어
국제시장 어귀에서 만난 50대 중후반의 네 명의 상인들은 의외로 노 후보 지지 성향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강아무개씨는 “이 후보가 부산하고 무슨 연고가 있다고 툭하면 여기가 자기 텃밭이라고 떠들어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30대 때 YS를 돕기 위해 야당 당원을 하기도 했다는 60대 초반의 한 상인은 “대통령선거는 국회의원 선거나 지자체 선거하곤 차원이 다르다”며 “여기를 한나라당이 싹쓸이했다고 대선도 이 후보가 압도적인 표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강조했다.
상인회 일을 맡고 있다는 그는 “어제 노 후보가 다녀갔는데 상인들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며 “서민적인 노 후보를 은근히 좋아하는 상인들이 요즘 꽤 많이 늘었다”고 귀띔했다. 때마침 PIFF 입구에 자리잡은 한나라당 선거지원 유세 차량을 구경하고 있던 30대 중반의 한 상인은 “확실히 단일화 이후에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노무현 찍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면서도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도 노무현이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말들 많았지만, 막상 결과를 보니까 떨어지더라. 문제는 말은 말로만 그치고 실제 표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대전]
대전 지역의 민심은 한층 더 얼어붙어 있었다. 딱히 충청권을 대변할 만한 대선주자가 없다는 점도 한 요인인 것 같았다. 이회창 후보의 ‘충남 고향’론도 노무현 후보의 ‘대전 수도 이전’ 공약도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여성소비자모임’의 대전지부 김남동 지부장은 “지금껏 대선에서 JP의 행보에 따라 YS도 도와주고, DJ도 밀어줘 봤지만 어느 정권에서나 충청이 찬밥신세인 건 마찬가지였다는 박탈감이 팽배해 있다”며 “이 후보는 나이가 너무 많은 ‘3김씨 세대’라는 점에서, 노 후보는 마치 민주노동당 후보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제나 충청은 찬밥신세
대전 지역의 밑바닥 정서를 훑고 다니면서 느낀 하나의 뚜렷한 특징은 의외로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지지층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대전역 앞 중앙시장에서 만난 한 50대 남성은 “단일화 방식에 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노 후보보다는 정 후보가 나서야 이 후보를 이길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대전역 앞에서 구두수선을 하는 이아무개씨(49)는 “이 후보는 너무 나이가 많다. 내일이면 벌써 일흔 아닌가? 노 후보는 어쩐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에는 좀 부족해 보인다. 정몽준씨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참 아쉽게 됐다”고 말했다.
68세의 한 노인은 “정씨가 말씨도 느릿느릿한 게 꼭 충청도 사람 같고, 죽은 아버지도 현대 회장 하면서 이곳에 참 많은 투자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이 후보가 충남 사람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국회의원 한 번 안 나온 양반이 무슨 충남 사람이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이 후보는 원 고향이 황해도라고 하던디” “서울서 나고 자랐으면 서울사람이제” “여기 가면 여기 사람, 저기 가면 저기 사람 한다던디, 고향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 같두만”이라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대전대학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한 40대 남성은 “1백 평 빌라에서 사는 정치인이 우리 같은 서민의 고통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정몽준씨가 많이 도와주면 아마 대전에서 노 후보 표가 꽤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 후보가 참 고생은 많이 한 것 같은데 딱히 믿음이 안가는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 대전 중앙시장의 모습. | ||
젊은층은 노무현 지지
그는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올해 대선 열기는 현저히 식어들었다”며 “간혹 젊은층 사이에서 노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정도”라고 지역 분위기를 전했다. 대전 시민들의 상당수는 오히려 서울 수도권의 중앙 민심을 더 궁금해했다. 기자와 만났던 시민들은 대부분 “서울 여론은 어떤가. 누가 된다고 하느냐”고 되묻곤 했다. 김 지부장은 이에 대해 “아직 표심을 못 정한 이 지역 부동층의 ‘될 사람 찍어주자’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50대 초반의 택시기사 박아무개씨 역시 “선거를 하긴 해야겠는데 아직 누굴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아무래도 이번에는 이회창씨가 되는 분위기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40대 후반의 중앙시장 한 여성 상인은 “아무래도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대통령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이 후보가 여러 면에서 경험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택시기사 정아무개씨(44)는 “한때 이 후보가 대통령 되면 나라가 발칵 뒤집힐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으나, 보수적인 이 지역 민심이 서서히 ‘대세’를 쫓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대전 충남의 여러 국회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옮겨가는 것만 봐도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일부 국회의원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목소리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흥동 한 공원에서 만난 50대 안팎의 시민들은 ‘결국 다음 총선을 내다보고 현실의 힘을 쫓아 간 것 아니겠는가. 어차피 자민련은 끝난 집구석이니 제 살길 찾겠다는데 굳이 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최근 한나라당을 탈당, 개혁신당으로 옮긴 김원웅 의원의 경우 “워낙 지역 살림에 부지런한 의원이어서 당적을 옮겼다 해서 큰 영향을 받진 않을 것”이라는 게 이곳 시민단체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JP 조용히 물러나야]
한편 JP에 대한 이 지역의 영향력은 상당히 약해진 것으로 보였다. 중앙시장의 한 50대 상인은 “이제 그 양반은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 괜히 그 양반 때문에 충청도만 멍청도 취급 받고 있지 않은가”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40대의 한 택시기사 역시 “이제 JP가 누굴 지지한다고 해서 충청표가 그쪽으로 확 쏠릴 일은 없을 것이고, 이인제씨 역시 아직 표몰이를 할 만큼 지역 기반을 쌓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더 이상 충청권의 맹주는 없다’는 지역 정서를 대변했다. 부산•대전=감명국 프리랜서 eos@newsban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