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가족>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지난 15일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부장 조상수)는 존속감금 등의 혐의로 A 씨(여·23)를 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A 씨는 이뿐 아니라 이사를 핑계로 아버지 B 씨(61)가 사는 집의 전세보증금 일부를 집주인으로부터 받아내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A 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다”면서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돈을 마음껏 써보고 싶었다”고 고백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의 정에 굶주리며 살아온 데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 아버지의 돈으로나마 한을 풀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B 씨는 딸 A 씨의 범행에 대해 ‘용서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대체 부녀지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걸까. 사건의 뒤안길을 거슬러 올라가봤다.
지난 9월 초 서울 종암경찰서 강력4팀에 ‘B 씨가 사라졌다’는 가족들의 실종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은 처음에 단순 가출 신고로 여겼지만 가족들의 얘기는 달랐다. 30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던 B 씨가 가출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의구심을 품은 경찰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실종자의 행방을 추적하던 경찰은 경기 부천시 원미구의 한 정신병원에 B 씨가 강제 수용된 사실을 파악하고 신병을 확보했다. 조사 결과 B 씨는 딸 A 씨에 의해서 알코올중독자로 몰려 무려 41일 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B 씨는 평소 반주 한두 잔 정도를 즐겨왔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술에 취하면 A 씨에게 전화를 걸어 심한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은 곧바로 패륜 범죄(존속감금 혐의) 피의자인 딸 A 씨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A 씨가 아버지가 사는 전셋집의 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받으러 찾아올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 잠복한 끝에 A 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
A 씨는 경찰 및 검찰 조사과정에서 “아버지 돈을 한번 써보고 싶었을 뿐이었다”라며 울먹거렸다고 한다. A 씨가 이러한 말을 꺼낸 배경에는 그의 불우한 가정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 씨의 주장에 따르면 A 씨는 피해자 B 씨의 후처 소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A 씨가 아버지와 함께 지낸 것은 수개월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 게다가 2001년 불우한 가정환경을 비관해 친어머니마저 자살하자 A 씨는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게 됐다.
이 무렵 미국에 있던 인척이 A 씨를 초청하며 우선 캐나다로 입국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미국으로 부를 테니 캐나다에서 잠시 체류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캐나다에 도착한 A 씨는 이 인척과 연락이 닿지 않아 현지에서 불법체류를 하게 된다. 2002년부터 작년 6월까지 캐나다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지냈다는 게 A 씨의 얘기다. A 씨는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하기 위해 난민신청을 했지만 심사에서 떨어지자 결국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A 씨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영어유치원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던 가운데 A 씨는 캐나다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건 돈이었다. 형편이 점점 궁해지자 A 씨는 실로 오랜만에 아버지 B 씨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B 씨는 그때까지 딸의 귀국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B 씨는 딸 A 씨가 돈을 요구하자 “5년 동안 연락도 한 번 안 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돈을 달라고 그러느냐”라며 따졌고 이에 A 씨도 험한 말을 퍼부으며 반항했다고 한다.
처음에 A 씨는 일산의 한 정신병원에 아버지 B 씨의 강제 입원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부천의 한 정신병원으로 변경해 B 씨의 입원을 미리 신청했다. 마침내 지난 8월 초 A 씨는 사설 응급환자이송단에 전화를 걸어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입원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전화 한 통화에 응급환자이송단은 집에 있던 B 씨를 바로 부천의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버렸다.
원래 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경우엔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는 게 원칙. 하지만 해당 병원 측은 그런 과정 없이 아버지 B 씨를 강제 입원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딸 A 씨가 입원 당일 전화로만 동의하고 3일 뒤에 나타나 동의서에 서명했는데도 문제를 삼지 않았던 것. 경찰은 추가로 해당 정신병원을 상대로 입원과정이 적법했는지에 대해 수사 중이다.
아버지 B 씨가 감금된 다음날 새벽 A 씨는 아버지가 혼자 살던 집에 몰래 들어가 아버지의 신용카드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날 이후 A 씨는 아버지의 신용카드로 그동안 자신이 사고 싶었던 것들을 거침없이 사들였다. 백화점에서 명품가방과 구두, 의류 등을 사고 댄스학원에 등록했으며 피부미용을 위해 400만 원을 결제하는 등 한 달간 모두 10차례에 걸쳐 약 1000만 원을 사용했다.
딸 A 씨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A 씨는 아버지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채기로 하고 집주인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였다. 아버지 B 씨를 대신해 전세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속여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 3200만 원 중 225만 원을 우선 받아 챙긴 것.
놀랍게도 당시 A 씨는 범행 후 캐나다로 도주할 준비도 모두 마쳤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버지 B 씨의 신용카드로 구매했던 의류 등은 벌써 캐나다로 보낸 상태였고 캐나다인 남편과 함께 돌아갈 캐나다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상대로 한 A 씨의 패륜 범행은 결국 B 씨의 강제 입원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꼬리를 밟히게 됐다.
한편 아버지 B 씨 측은 딸 A 씨의 처벌을 강하게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이후 B 씨는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멀쩡한 사람이 41일 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돼 약물치료 등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고 경찰 관계자는 밝혔다.
이번 사건을 담당했던 한 형사는 “서글프면서도 안타깝다”라고 이 사건에 대한 심정을 밝혔다. 그는 “피의자 A 씨가 후처 자식으로서 홀대 받았던 앙금이 쌓여 결국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부모를 돈 때문에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