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지난 2003년 5월 4일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A 씨는 씩씩거리며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회선배 서중석 씨(가명·당시 45세)의 집에 찾아갔다.
당일 아침 A 씨는 서 씨와 골프를 치러 가기로 수일 전부터 약속이 돼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서 씨는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A 씨가 서 씨의 논현동 아파트를 찾았을 때 서 씨네 집 현관문은 열려 있는 상태였다. 서 씨를 찾아 집 안에 들어선 A 씨는 안에서 풍겨 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집 안을 둘러보던 A 씨는 잠시 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서 씨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주방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5년 전 서울 강남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일명 ‘M가라오케 사장 피살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경찰 조사 결과 범인은 서 씨와 한때 호형호제하며 막역하게 지내던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로 밝혀졌는데 채권채무로 인해 빚어진 원한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강남경찰서 강력5팀 이춘기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피살자가 연예계 마당발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라 그런지 당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이 대단했던 사건으로 기억된다. 범행의 잔인성이나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사회가 상당히 시끄러웠었다. 돈 문제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이 돈의 변제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어오던 중 벌어진 참극이었는데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채무자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줬던 것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사람이 원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이 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현장 상황은 정말 소름이 확 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수많은 살인사건 현장을 봐온 수사팀으로서도 경악할 정도였으니까. 서 씨는 복부와 어깨, 옆구리 등 몸 전체에 걸쳐 무려 14군데나 칼에 찔려 죽어 있었는데 범행에 사용된 칼은 정수리에 그대로 박혀 있는 상태였다. 집 안이 온통 피바다였음은 물론이다. 서 씨는 그렇게 흉기에 찔리면서도 끝까지 도망가려 했던 듯 벽에는 그의 피 묻은 손자국이 낭자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짐작케 하고도 남았다.”
자신의 집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서 씨는 강남 중심가에서 유명 가라오케를 운영하던 인물로 주점 영업과 사채업 등으로 상당한 돈을 모은 소문난 재력가였다. 당시 서 씨는 8년 전 이혼한 뒤 그 전해 12월부터 이 아파트에 혼자 거주하고 있었는데 부패가 진행되고 있던 사체의 상태로 보아 살해된 지 이미 수일이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도대체 누가 왜 서 씨를 살해한 것일까. 집 안을 수색하던 수사팀은 1억 원에 달하는 서 씨의 명품시계가 사라진 것에 주목, 처음에는 강도에 의한 범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열 군데 이상을 찔러 무지막지하게 살해한 잔혹한 범행수법으로 보아 단순 강도에 의한 살인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범인이 현장에 남긴 유일한 단서는 235㎜ 정도의 족적이었다. 수사팀은 성인남성의 발 크기치고는 너무 작다는 점을 감안해 현장에 의문의 여성이 함께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를 진행했다. 특히 피살된 서 씨가 평소 여자 연예인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여자 연예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조사 결과 서 씨는 사체로 발견되기 약 일주일 전인 4월 27일 저녁 8시 30분경에 아파트 CCTV에 찍힌 것을 마지막으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따라서 수사팀은 27일 자정 전후에 서 씨가 살해된 것으로 보고 그 시간대 서 씨의 빌라를 찾은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CCTV에도 외부 사람이 서 씨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집 안에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은 서 씨가 안에서 직접 문을 열어줬으며 범인이 평소 서 씨와 안면이 있는 면식범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주는 정황 증거였다.
수사팀은 서 씨의 신상과 주변상황 등을 분석해 일단 원한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살해된 서 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수사팀이 주목한 점은 서 씨가 그 일대에서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서 씨가 운영하던 가라오케는 유명 연예인들의 뒤풀이 장소로도 자주 이용되곤 했는데 서 씨는 ‘연예계 마당발’로 통할 정도로 평소 연예계 인사들과 폭넓은 친분을 쌓아왔으며 연예 관련 사업에 투자를 하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가라오케 운영과 사채업으로 큰돈을 번 서 씨는 여유로운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다수의 유명 연예인과도 깊은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 서 씨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자택에서 피살되자 당시 업소와 연예계 주변에서는 연예인 연루설 등 확인되지 않은 갖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특히 수사팀은 서 씨가 풍부한 자금을 토대로 연예사업 투자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주변사람들의 진술에 따라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과정에서 원한을 샀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서 씨와 금전 거래를 맺은 인물들을 파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김대식 씨(가명·49세)였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인기 여자 탤런트의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던 김 씨는 당시 유명 연예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기획사 운영이 잘 되지 않아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김 씨는 그해 초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 씨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5000만 원을 빌렸으나 약속된 기한이 지나도 원금을 갚지 못해 빚이 7500만 원까지 늘어난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변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서 씨는 김 씨에게 채무 변제를 강하게 독촉했고 두 사람은 돈 문제로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다고 한다. 특히 서 씨는 돈 문제에 있어서는 주변에서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철저했나보더라. 그래서인지 서 씨에 대해 안 좋게 평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채무를 둘러싼 두 사람의 상황으로 볼 때 김 씨가 서 씨에게 반감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특히 서 씨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분석한 결과 최종 통화자 역시 김 씨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김 씨를 불러서 조사를 하기로 했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김대식에게 전화를 했더니 휴대폰이 꺼져 있더라. 그래서 김 씨의 부인을 통해 연락을 시도했다. 얼마 후 통화가 됐는데 대뜸 부산에 있다는 거다. ‘서중석이 죽었다’고 했더니 김대식은 ‘왜요?’라며 깜짝 놀라더라. 우리는 사건 관련 참고인으로 조사할 게 있다며 그를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정작 김 씨를 본 수사팀은 혐의점에 대해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 씨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두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수사팀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피살된 서 씨는 체격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태권도 등 각종 운동을 많이 한 사람으로 1 대 1로 싸울 경우 절대 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수사팀으로서는 다리가 성치 못한 김 씨가 서 씨를 제압하고 살해했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 결과에 따르면 김 씨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이어지는 이 형사의 얘기.
“경찰서에 와서도 그는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손에 베인 자국이 있었다. ‘손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김대식은 만화방에서 병이 깨져서 다친 거라고 둘러대더라. 하지만 그간의 수사경험상 그 상처는 사람을 칼로 찌를 때 반동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흉기에 자기 손이 베인 것과 동일한 모양이었다. 특히 장애를 갖고 있던 김 씨의 발 크기는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과 정확히 일치했다. 뿐만 아니라 사라진 서 씨의 시계를 김 씨가 고가에 처분한 사실도 밝혀졌다. 수사팀의 추궁에 김 씨는 결국 모든 것을 단념한 듯 담담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김 씨는 왜 서 씨를 그렇게 끔찍하게 살해한 것일까. 김 씨의 자백에 의해 드러난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두 사람은 평소 ‘형’ ‘동생’ 할 정도로 상당히 가깝게 지내왔다고 한다. 하지만 자금난에 쫓기던 김 씨가 서 씨에게 급전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점차 나아지겠거니 생각했지만 김 씨의 사업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고 변제기간이 지났으나 김 씨는 돈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김대식이 계속 돈을 갚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자 사건 당일인 4월 28일 서 씨가 그를 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간 돈을 회수해야 하는 서 씨로서는 ‘오늘 어떻게든 결판을 내보자’는 생각이었나 보더라. 김대식 역시 한 번 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마지막으로 매달려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서 씨의 집에 찾아간 김대식은 무조건 ‘살려달라. 한 번만 사정 좀 봐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김대식의 얘기로는 ‘꼭 갚겠다. 딱 한 달이라도 시간을 더 달라’며 무릎까지 꿇고 빌기까지 했다는 거다. 남자로서 자존심도 다 버리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정했건만 서 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더라는 거다.”
하지만 정작 김 씨로 하여금 손에 칼을 쥐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이 형사의 얘기.
“앞서 밝혔듯이 김대식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서 씨는 김 씨에게 ‘야 이 XX… XX아. 대체 내 돈 언제 갚을 거냐’라며 심한 욕설과 함께 신체적 결함을 들먹거리며 모욕을 줬다고 한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사정 했는데 불편한 다리를 빗대어 병신 운운하니 김 씨로서는 더없이 비참했다는 거다. 게다가 서 씨는 김 씨의 신체적 장애를 들먹거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부인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야 이 XX아, 돈이 없으면 네 마누라라도 팔아서 갚아야 할 것 아니냐’ 뭐 이런 얘기를 들으니 순간 눈이 뒤집혔다는 거다.”
특히 당시 김 씨는 돈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 씨에게 이미 당할 만큼 당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 씨가 빚 독촉을 할 때마다 김 씨는 변제기간을 연장해달라는 말로 사정을 하곤 했는데 서 씨는 사람들이 많은 커피숍에서 심한 욕을 하는 것은 물론, 얼굴에 물을 뿌리거나 침을 뱉는 등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모욕적인 처사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씨의 진술에 따르면 변제기간 연장을 사정하기 위해 찾아간 그 날도 서 씨의 태도는 여태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서 씨가 내뱉는 모욕적인 말에 모멸감을 견디지 못한 김 씨는 주방에 있던 흉기를 들고 서 씨에게 달려들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때 ‘형 동생’처럼 친하게 지냈던 서 씨와 김 씨. 하지만 돈 문제는 두 사람의 사이를 원수처럼 갈라놓았고 흉기처럼 던져진 매몰찬 언어들은 결국 살인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