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놈 목소리>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창원에서 일어났다. 더구나 이 4명의 대담한 ‘납치 협박범’은 놀랍게도 피해자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왜 이 같은 끔찍한 일을 벌인 것일까. 창원에서 일어난 사건의 발단은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수영 군(가명·16·고교 1년)은 워낙 착실하고 순했던 탓에 주변 사람들과 싸워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김 군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꿔 달라’는 무리가 생긴 것은 그가 중학교 졸업을 불과 몇 달 남겨둔 시점이었다.
사건의 시발은 이렇다. 어느 날 김 군에게 돈을 뺏은 적이 있는 학생 중 한 명이 PC방에서 친구 장병연 군(가명·16)을 만났다. 장 군은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돈이 없어 PC방에 같이 못가겠다”던 이 친구가 나타나자 의아했다. “돈이 어디서 났냐”고 묻자 친구는 장 군에게 “우리 학교에 돈을 잘 빌려 주는 친구가 있다”며 김 군의 이름을 알려 줬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 군의 머릿속에는 ‘게임’밖에 없었기 때문에 김 군에 대해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장 군의 머릿속에 김 군이 다시 떠오른 것은 지난 3월 13일. 이날 장 군은 자신의 친구 황상철 군(가명·16·고교 1년), 한무현 군(가명·16·고교 1년)과 함께 김해시의 한 PC방에 놀러갔다.
경찰에 따르면 장 군은 평소 PC방을 전전하는 등 학교를 잘 다니지 않아 또래 친구들이 고교로 진학할 때 중학교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 군은 장 군의 친구들 중 일명 ‘가장 잘나가던’ 친구. 반면 한 군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단지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던 아이였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한 군과 황 군은 서로 모르던 사이였고 이날 장 군을 통해 처음 만났다고 한다.
어쨌든 이날 PC방에 온 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돈은 달랑 몇 천원. 이들이 다음날까지 PC방에서 머물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불현듯 장 군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것이 몇 달 전 친구에게 들었던 ‘돈 잘 빌려 주는 김 군’이었다. 장 군은 친구들에게 김 군의 얘기를 꺼냈고 이들은 김 군에게서 돈을 뺏기로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그날 오후 장 군 일행은 우선 김 군이 진학했다는 창원 인근의 B 고등학교에 찾아갔다. 장 군은 B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너희 학교에 김수영이란 친구에게 중학교 동창이 후문에 와 있으니 좀 나오라고 전해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이날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김 군은 자신의 ‘옛 친구’를 보기 위해 후문으로 나갔다 친구가 없자 교실로 되돌아 갔고 장 군 일행 역시 김 군의 얼굴을 몰랐던 탓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황 군은 “내일 김수영을 (창원으로) 데려와라. 한 번 잡아와봐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거주지인 창원으로 돌아갔고 장 군과 한 군은 김 군의 고등학교 근방 PC방에서 ‘내일의 성공’을 기약하며 밤을 새웠다.
다음날인 지난 3월 14일 아침. 장 군과 한 군은 다시 B 학교로 찾아가 전날 김 군에게 메시지를 전해 줬던 친구에게 문자를 남겼다. ‘어제 후문으로 보내 달랬는데 왜 안 보냈냐. 다시 보내 달라’는 것. ‘얘들이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이 친구는 다시 한 번 장 군의 메시지를 김 군에게 전해 줬다.
장 군 일행은 이번에는 후문으로 나오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네가 김수영이 맞느냐”고 물었다. 결국 김 군을 찾은 장 군과 한 군은 “잠시 얘기 좀 하자”며 김 군을 끌고 가 창원행 버스에 올라탔다. 김 군이 이들의 협박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고 끌려갔던 시간은 오전 10시경. 실내화를 신은 채로 장 군 일행에게 30여 분간 끌려간 김 군이 도착한 곳은 창원 인근의 한 야산이었다. 전날 이들에게 “잡아와봐라”고 지시했던 황 군도 창원의 한 PC방에 있다가 바로 달려왔다.
▲ 영화 <그놈 목소리>의 한 장면. | ||
다음 단계는 한 군을 시켜 집의 비밀번호를 확인하는 일. 그러나 한 군이 산을 내려간 몇 분 후 장 군에게 한 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비밀번호 다 틀리다. 문이 안 열린다”는 것. 김 군이 비밀번호를 다르게 알려준 것이었다.
이때부터 장 군과 황 군은 욕설을 퍼부으며 김 군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황 군은 “PC방이나 가자”고 전화를 걸어 온 자신의 2년 선배 권혁상 군(가명·18·고교 3년)도 산으로 불러들였다. 한 군도 다시 올라와 이들 일행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구덩이를 판 4인조가 완성된 것. 도구는 산 중턱 텃밭에서 발견한 삽과 곡괭이를 사용했다.
이들은 김 군에게 자신들이 판 구덩이에 “들어가 누워라”고 윽박질렀다. 흙을 퍼붓지는 않았지만 김 군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김 군은 후에 경찰 조사에서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살려 달라”는 말을 수없이 외쳤지만 목소리가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 겁에 질린 김 군의 모습을 확인한 이들은 김 군을 구덩이에서 꺼내 준 후 다른 ‘시나리오’를 계획했다. “(김 군의) 가족에게 협박 전화를 해 돈 1억 원을 요구하자”는 것.
이들의 범행 계획은 나름대로 치밀했다. 우선 위치 추적을 우려해 휴대전화 대신 산 밑의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리곤 김 군이 공중전화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나 모르는 사람한테 납치됐어’라는 말까지만 하고 그 다음 한 군이 전화를 받아 ‘10분 안에 전화를 할 테니까 1억 원을 준비해 놔라. 그렇지 않으면 아들 목소리를 못들을 줄 알아라’라고 말하는 협박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마지막 ‘1억 원 멘트’를 하기로 했던 한 군이 전화기를 넘겨 받은 뒤 너무 긴장한 탓에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말만 하다가 전화를 끊어버린 것. 이 와중에 그 옆에서 “‘목소리 못 듣게 될 줄 알아라’고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장 군의 목소리도 김 군 어머니의 귓가에 들려왔다. 김 군의 어머니는 이때까지만 해도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다.
잠시 후 김 군의 어머니는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첫 목소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인 김 군. 울먹이는 김 군에게 어머니는 “일단 너는 가만히 있어 엄마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한 뒤 협박범들에게 “돈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 바로 어머니가 ‘다이얼’을 돌린 곳은 경찰서. 신고가 들어온 시간은 14시 10분.
창원중부경찰서 강력 4팀은 그 즉시 김 군의 학교로 향했다. 경찰은 탐문 결과 김 군에게 메시지를 전해 준 학생으로부터 “장병연이란 애가 데리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협박 전화가 걸려온 지 1시간 정도 경과된 촉박한 순간. 경찰은 우선 장 군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경찰이 장 군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경찰은 장 군에게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와서 자수하라”고 달랬다. 그러나 장 군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며 발뺌했다. “위치도 어딘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자수하는 게 좋다”며 경찰은 계속 장 군을 설득했다.
경찰이 모든 사실을 알아챘다고 생각한 이들은 김 군을 풀어 준 뒤 한 군은 자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 김 군이 어머니 품으로 돌아온 것은 당일 오후 4시경. 납치된 지 6시간 만이었다. 납치 협박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신속한 신고와 경찰의 발 빠른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 지 여지없이 보여 준 사건이었다.
경찰은 지난 18일 오후 잠복 5일 만에 장 군의 집 앞에서 도망쳤던 일당 3명을 모두 검거했다. 이들은 경찰 진술에서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겠다는 끔찍한 수법을 어디서 배웠느냐”는 질문에 “영화 <그놈 목소리>를 보고 따라했다”고 밝혔다. 1억 원이란 큰 돈을 요구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냥 쓰고 싶어서”라고 했다.
검거된 이들 3명은 구속 기소돼 지난 27일 검찰에 송치됐다. 한 군은 “자수와 타의에 의한 가담”이 인정돼 불구속 기소됐다. 피해자 김 군은 다행히도 전치 2주의 가벼운 상해를 입는 데 그쳤지만 이번 사건으로 받은 김 군의 정신적 충격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임에 분명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