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총장이 폭로한 1차 도청자료는 24건. 이 가운데 4건이 여권 내부의 통화내역이고 10건은 정치인과 정치부기자 사이의 통화내역, 그리고 나머지 10건은 한나라당 내부 인사들끼리의 통화내역이었다. 바로 이 한나라당 인사들끼리의 통화내역이 한나라당 내부를 들쑤셔 놓은 것이다.
한나라당 인사들끼리의 통화내역, 정치인과 기자들 사이의 통화내역은 도청이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확인시키기 위해 한나라당이 폭로에 포함시킨 것이다. 실제로 폭로 직후 도청자료에 거론된 한나라당 인사들은 물론 정치부 기자들의 대부분은 그런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1차 폭로는 박근혜 의원 탈당과 노풍, 이에 따른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급락과 한나라당 내분이 극심했던 지난 3월쯤 통화내역이었다. 당연히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 이회창 교체론이 공공연히 거론되던 시기였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들끼리 이회창 교체론, 또는 이회창 총재의 실책 등을 논의한 통화내용이 도청자료에 포함됐던 것이다.
심지어 이회창 대신 누구를 내세워야 한다며 구체적인 후보교체론의 내용까지 논의한 도청자료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한나라당이 폭로한 도청자료 가운데 전재희 의원과 홍준표 의원이 통화한 내용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홍의원은 “이 총재는 부산 등 영남 지지율이 급락함에 따라 후보교체론이 대두될 것으로 전망되는 바, 이 총재가 이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인식을 바꿔야 하는데, 고집을 부려 답답한 실정으로서…”라고 돼 있다. 홍 의원은 자료공개 직후 “당시에는 당 안팎의 좋지 않은 여론을 얘기했던 것일 뿐 내 의견이 아니다”라고 해명에 급급했다고 한다.
문제는 한나라당 의원 사이의 통화내용 가운데 김 총장이 공개하지 않은 도청 자료가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제보받은 국정원 도청자료를 면밀히 분석, 공개할 것과 공개하지 않을 것을 가려냈다고 한다. 공개하지 않은 자료 가운데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회창 후보 교체론을 강력히 주장하거나, 이 총재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 이 총재의 측근을 폄하한 내용 등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핵심당직자는 “한나라당 인사들끼리의 통화내역 도청자료를 모두 공개할 경우 대선을 앞두고 당 내분을 부추길 우려가 있고, 해당 인사가 반발할 가능성도 있어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보된 자료 중 폭로할 것과 폭로하지 않을 것을 분류했던 한 당직자의 말에 따르면 한나라당 의원들끼리의 통화내역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고 한다.
모 의원은 동료의원과의 통화에서 이회창 후보의 측근정치를 비판하면서 한 측근을 “빨갱이”에 비유했다고 한다. 또다른 의원은 “당장 이회창 후보를 갈아치우고 새로운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 이대로는 노무현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이 국정원 도청자료라 며 폭로한 정치인 등의 통화내역이 같은 당 의 원들을 난감하게 하고 있다. | ||
특히 지난 3월 당 내분때 이회창 후보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다녔거나, 공공연히 후보교체론을 제기했던 의원들은 핵심당직자에게 자신의 통화내역에 대한 도청자료가 있는지 알아보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몇몇 의원은 이 후보 측근들에게 “당시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시중에 떠도는 얘기나 당 내부의 분위기를 그저 동료의원과 당을 걱정하며 얘기를 나눴을 뿐”이라고 해명하고 다니는 촌극까지 벌어지고 있다.
물론 핵심당직자들은 비공개 도청자료를 문제삼을 생각이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이 후보의 한 측근은 “우리의 목적은 국정원 도청을 국민에게 알려 현정권의 비민주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내부 분란을 일으키거나 특정의원을 음해할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해당의원들은 이 후보가 당선될 경우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에 잠을 설친다고 한다.
한 의원은 “나도 그때(3월쯤) 이 후보 교체론의 필요성에 대해 전화로 다른 의원이나 기자들과 통화한 적이 있다”면서 “내 전화가 도청됐다면 분명히 도청자료가 있을 텐데, 앞으로 이 후보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한나라당은 1일 이부영 선대위 부위원장이 나서 2차 폭로를 했다. 여권 내부 관련 9건과 한나라당 내부 관련 7건이다. 물론 여기에도 비공개 도청자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부영 선대위 부위원장은 “청와대와 민주당, 국정원이 계속 도청을 부인할 경우 3차, 4차 폭로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보를 통해 확보한 도청자료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뜻이다. 김영일 사무총장은 “나도 자료를 다 보지 못했다”고 말해 제보량이 엄청나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럴수록 한나라당 의원들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한 의원은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도청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것이 이회창 후보를 비롯한 핵심당직자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다.
의원들과 통화를 했던 일부 언론인들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기자들과 의원들 간의 통화 내용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말들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내용이 한나라당 핵심층에 알려졌기 때문에 조심스런 처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일부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불가피하게 정치인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일부 언론사 간부들도 이러한 오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과 정치인과의 통화 내역을 한나라당이 입수했는지를 은밀히 알아보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성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