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바르게 살자>의 한 장면. | ||
사건 당일 오전 6시 40분경. 은행 숙직실에서 잠을 자던 파출부 이복자 씨(가명·40)는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숙직실을 나섰다. 식당으로 향하던 이 씨는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걸음을 멈춰섰다.
‘쿵쿵’
누군가 둔탁한 물체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둔탁한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나는 방은 대형 금고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이 씨가 금고를 향해 소리치자 금고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끙끙’거리는 사람의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이 씨는 즉시 인근의 충장로 파출소에 신고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금고문을 열어본 경찰관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폐가 들어있어야 할 대형금고 안에는 무려 5명의 사람들이 감금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수건과 넥타이로 눈과 입이 가려진 채 노끈 등으로 손발이 모두 결박돼 있었다.”
감금돼 있던 사람들은 전날 밤 당직을 섰던 은행직원 두 명을 비롯해 수위 겸 운전사, 그리고 은행 청소원인 박길수 씨(가명·53)와 심순철 씨(가명·34) 등 5명이었다.
이들은 극심한 공포와 충격으로 거의 실신상태였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들은 ‘새벽에 3명의 괴한이 침입해 직원들을 모두 결박한 뒤 금고문을 열고 돈을 모조리 털어갔다’는 공통된 진술을 했다.
연말을 하루 앞두고 터진 대형 사건에 은행은 비상이 걸렸다. 현장에 도착해 사라진 돈의 액수를 확인하던 은행 관계자들은 망연자실했다. 범인들이 강취해간 돈은 한화 3300만 원과 미화 3만 달러 등으로 총 6700여 만 원에 달했던 것이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15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전남도경은 애초 충장로 파출소에 설치됐던 수사본부를 다음날 광주경찰서(현 광주동부경찰서)로 이전, 수사체제를 재정비하는 한편 범인들이 이미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국 공조수사를 펼쳤다. 사건을 보고받은 치안국(현 경찰청)은 현지에 당시 총경이었던 정상천 씨 등을 급파, 수사지휘를 하도록 했다.
범인들이 현장에 남긴 유일한 단서는 은행 마당에 찍힌 리어카 자국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범인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조사결과 괴한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은행 청소원인 심순철 씨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심 씨 등은 졸지에 결박된 상태로 숙직실에 감금됐다. 범인들은 당시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두 명의 은행직원마저 노끈으로 손발을 결박하고 넥타이와 수건으로 눈과 입을 가린 후 숙직실에 감금했다. 그리고 범인들은 잠시 후 수위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경비까지 잡아와 같은 방법으로 결박하고 감금했다.
일당 중 한 명은 숙직실 입구에서 엽총을 들고 이들을 감시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금고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범인 중 두 명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 후였다. 목적을 달성했는지 상당히 들뜬 목소리였다. 이들은 숙직실 안에 있던 5명을 인솔해 금고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들을 일제히 대형 금고 안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가 버린 채 도주했다. 은행 식모가 수상한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해서 구출할 때까지 이들은 약 한 시간 반 이상을 폐쇄된 금고 안에 갇혀있었던 셈이었다.
범인들은 대체 누구일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천만다행으로 피해자들은 극도의 공포상황에서도 범인 3명의 인상착의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피해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종합한 결과 그려낸 범인의 공통된 외형은 일단 단신의 30~40대 남성들이라는 점이었다. 수사팀은 범인들이 파출소를 지척에 두고 과감한 강도행각을 벌인 것으로 보아 초범이 아닐 것으로 판단하고 인근 지역 동일수법 전과자 등을 상대로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가장 큰 의문은 범인들이 어떻게 금고를 열 수 있었느냐였다. 당시 한국은행 측은 3중으로 보안장치가 돼있던 금고가 털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3중으로 된 금고문은 제각기 다른 다이얼 비밀번호가 있는 데다가 다이얼을 맞춘 후에도 또 다시 열쇠로 열어야 했다. 잘못 작동할 경우에는 곧바로 경보음이 울리게 돼 있었다.
하지만 범인들이 금고 안에 있는 돈을 싹쓸이하고 달아나는 데 걸린 시간은 30여 분이었다. 피해자들은 사건발생 당시 어떤 경보음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 와중에 수사팀은 뭔가 석연치 않은 사실을 포착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바로 범인들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청소원 심순철의 진술이었다. 심 씨는 사건 당일 새벽 4시부터 은행 뒷마당을 쓸었던 것으로 확인됐는데 평소 심 씨가 청소를 시작하는 시각보다 무려 1시간가량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더구나 그 시각 눈은 쌓일 만큼 많이 내리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내부에서 켜고 끄는 은행 외부등이 사건발생 시간대는 일제히 꺼져 있었던 것이었다. 심순철은 사건 당일 가장 먼저 깨어있었던 인물이었다. 잠자고 있던 직원들이 일부러 외부등을 꺼놨을 리는 없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일어난 심 씨가 내부에서 은행 외부등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컸다. 3년째 이 은행 청소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심 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은행에서 숙직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 내부사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청소원이라는 신분상 심 씨는 은행 외부와 내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심 씨는 범행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수사팀이 허점을 파고들며 집중적으로 신문하자 결국 사건발생 33시간만인 12월 31일 오후 1시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성장한 심 씨는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1963년 가을 한국은행 청소원으로 입사했다. 사근사근하고 밝은 성격이었던 심 씨는 직장생활에 잘 적응해나가는 듯 보였다. 항상 밝은 얼굴로 은행 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심 씨는 은행직원들과 이틀에 한 번씩 숙직을 같이 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심 씨의 마음속에서는 불평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심순철은 당시 85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빚이 50만 원이나 있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리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직원들에게 열등감도 느꼈던 것 같다. 입사후부터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직원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달 받는 뻔한 급여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심순철은 결국 위험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은행 금고를 털어 떵떵거리며 한번 살아보자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심순철은 그해 10월 초부터 금고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 신임을 얻은 은행원들을 통해 금고 여는 법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곁눈질로 금고 다이얼번호를 알아낸 심 씨는 이중 잠금장치를 풀 수 있는 금고 열쇠들까지 일일이 복제해두었던 것이다.”
혼자서는 범행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심 씨는 매형인 허재구(가명·38·토목하청업자)를 끌어들였다. 처남의 유혹에 빠진 허 씨는 자신의 일가친척인 허칠구(가명·40·토목기사)와 허동팔(가명·33·마을이장)을 끌어들였다.
11월 14일경 금고 다이얼 회전문을 따는 법을 숙지하고 3중으로 된 금고 자물쇠를 푸는 사제열쇠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이들은 12월 10일 다시 광주시내의 한 다방에 집결한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범행 후 돈을 어디에 숨겨놓을지 의논하기 위한 자리였다. 범행 후 거액을 운반하거나 시중 금융기관에 입금시킬 경우 주목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고심 끝에 전셋집을 얻어 그 곳에 돈을 숨기기로 의견을 모은다. 문제는 전셋집을 마련할 자금이었다. 심순철은 그동안 익힌 기술로 12월 14일 금고문을 열고 현금 120만 원을 훔쳤다. 그 돈으로 30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이들 일당이 범행을 하기로 잡은 날짜는 주범인 심 씨가 숙직을 하는 12월 30일 새벽이었다. 범행 전날 1차로 은행 뒷마당에서 만난 이들은 침입로와 도주로 등을 다시 한 번 익히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 당일, 새벽 4시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 숙직실에 있던 심 씨가 뒷마당을 청소하는 척하면서 은행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공범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심 씨까지 포박한 공범들은 나머지 직원들을 제압, 돈을 훔쳐 유유히 달아난 것이었다.
심 씨를 대동해 이들이 은신해 있는 전셋집을 급습한 수사팀은 집에 있던 허칠구를 검거했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된 엽총과 흉기 등을 증거물로 압수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지었다.
훔쳐간 돈을 미리 준비해둔 리어카에 싣고 전셋집으로 옮긴 이들은 미리 파 둔 2m 깊이의 구덩이에 돈을 묻고 가마니로 덮어놨던 것으로 드러났다. 천만다행으로 돈은 부대자루 11개에 담긴 채 그대로 있었는데 이들이 전셋집을 구하고 남은 현금 85만원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