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6월 27일 의정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김 순경 출처=92보도사진연감 | ||
잠시 후 형사기동대차가 나타났고 뒤이어 범인을 태운 한 대의 승용차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순간 주민들이 일제히 차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날 현장검증을 위해 경찰은 120여 명으로 구성된 전경 1개 중대를 동원했지만 분노에 찬 주민들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범인의 얼굴을 보려는 주민들과 경찰의 실랑이는 30여 분 이상 계속됐다. 결국 수십 명의 형사와 전경들이 주민을 이중삼중으로 막고서야 간신히 길을 뚫었다.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이 채워진 젊은 남자가 형사들의 포위를 받으며 승용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어떤 놈인지 얼굴 좀 보자” “저 놈 죽여라”는 분노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청년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통곡소리는 현장검증이 진행되는 내내 그칠 줄 몰랐다. 한 젊은 여성은 “내 남편 살려내라”며 울부짖다가 끝내 실신하기도 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991년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의정부 순경 총기난사사건’이다.6월 26일 오후 8시 40분경. 의정부시 금오동의 한 골목. 저녁 식사를 마친 주민들은 저마다 손에 부채를 들고 골목 이곳저곳에서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날과 다름없는 한여름 저녁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잠시 후 벌어질 끔찍한 사건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 골목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서울OO경찰서 XX파출소 소속 김승협 순경(가명·28)이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골목에 들어선 김 순경은 김창석 씨(가명·57)가 운영하는 식당 앞에 멈춰섰다.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김 순경은 식당 앞에 서 있던 김 씨의 셋째 아들 김승진 씨(가명·31)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김 씨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척거리에서 급소를 맞은 김 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부녀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총소리를 듣고 골목으로 나온 상인들과 주민들은 참혹한 현장을 보고 말을 잃었다.
특히 식당 맞은 편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던 식당주인 김 씨의 둘째 아들 김승남 씨(가명·33)는 김 순경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판단, 식당에서 30여m 떨어진 세탁소로 도망갔다.
무작정 세탁소로 뛰어 들어간 김 씨는 세탁소 내부에 있는 작은 방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김 순경은 김 씨를 따라 세탁소 방 안까지 들어왔고 김 씨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김 씨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연속으로 두 발의 총을 맞은 김 씨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김 씨 형제를 잇달아 살해한 김 순경이 식당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몇 분 후였다. 식당 앞은 이미 피바다였다. 평화롭던 골목은 주민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하지만 김 순경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광기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김 순경은 세탁소를 가로질러 또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 순경이 도착한 곳은 세탁소에서 200여m 떨어진 슈퍼마켓이었다. 그곳은 살해된 김 씨 형제의 여동생 승미 씨(가명·28)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슈퍼마켓 유리 문을 박차고 들어간 김 순경은 승미 씨 부부를 찾았다.하지만 이날 승미 씨 부부는 가게에 없었다. 당시 승미 씨가 임신 8개월이었기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있어 이들 부부 대신 시동생 부부가 대신 일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 순경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김 순경은 카운터에 앉아있던 시동생 부부 박창수 씨(가명·31)와 이지영 씨(가명·27)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얼굴과 귀, 오른쪽 가슴 등을 맞은 이들 부부는 다급히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날 밤 11시 20분께 사망하고 말았다.”
김 순경이 4명을 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 분에 불과했다. 현장은 참혹했다. 조용하던 골목 안은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졸지에 두 아들 등 일가족 4명을 잃은 식당주인 김창석 씨와 그의 가족들은 뜻하지 않은 줄초상에 통곡하다 실신하고 말았다.
주민들의 충격도 엄청났다. 이웃사촌들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주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부녀자들은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켰다. 특히 현직 경찰의 광기 어린 권총 난사극에 주민들은 밤새 극도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88년 가을 순경으로 특채된 김 순경은 90년 8월 OO경찰서 XX파출소에서 방범순찰요원으로 근무해왔었다. 사건 당일 김 순경은 파출소를 나서기 전 사격연습실에서 권총과 실탄을 몰래 가지고 나갔던 것으로 드러나 계획적인 범행 쪽으로 힘이 실렸다.
가장 시급한 것은 김 순경을 검거하는 일이었다. 이성을 잃어버린 김 순경이 도주과정에서 또다시 무모한 일을 저지를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또 김 순경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도주경로를 탐색하던 수사팀은 김 순경이 범행 후인 이날 밤 10시 20분께 옛 동료의 집에 들른 사실을 확인했다. 김 순경은 동료에게 “나는 큰 일을 저질렀으니 죽어야겠다. 인천 쪽으로 간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금 2만 원을 빌려 잠적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서울에서 인천 등 교외로 통하는 국도 곳곳에 임시 검문소를 설치, 검문검색을 실시하는 동시에 김 순경의 동선파악에 주력했다. 특히 김 순경이 동료에게 언급한 행선지가 인천이라는 점에 주목, 인천으로 수사대를 급파해 그 일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4시간여 만인 27일 새벽 1시 15분께 월미도 부두에 혼자 앉아있는 김 순경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김 순경은 아무런 저항없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수사팀은 권총과 실탄을 압수한 뒤 김 순경을 서울 남대문 경찰서로 압송했다. 인천으로 간 이유에 대해 김 순경은 “바다구경을 한 번 한 뒤 자살하려고 했다.
자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 야속하다”고 말했다.도대체 김 순경은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일까. 김 순경을 상대로 조사를 실시한 수사팀은 드러나는 사건의 진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4명을 상대로 광란의 총기난사극을 벌인 범행동기는 너무도 사소한 것이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의정부경찰서는 그날 오후 7시 40분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이웃사촌끼리의 주차시비로 불거진 참극’으로 결론을 내렸다.김 순경과 김 씨 집안과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지난 89년 8월 초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해 여름, 식당 주인 김 씨의 첫째 아들 김승직 씨(가명·35)가 내리쬐는 뙤약볕을 피해 김 순경의 집 앞에 승용차를 주차해둔 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양쪽 집안은 시비를 가리느라 싸움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화를 억누르지 못한 김 순경이 김 씨의 셋째 아들 승진 씨를 폭행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