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 비하나회 출신이었던 백승도 대령(육사 31기)이 뿌린 것으로 밝혀진 문서에는 1백34명에 달하는 하나회 회원 명단이 모두 실명으로 실려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김영삼 정부의 군 개혁 방향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번에 문제가 된 괴문서에도 음주운전에 뺑소니경력, 민간인으로부터 향응물의, 부대지휘 결함으로 인한 처벌경력 등 10가지 사례에 군 고위직 인사 10여 명의 실명이 등장했다.
시기적인 공통점도 눈에 띈다. 하나회 명단이 살포된 시점은 당시 정부가 ‘군 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 인사와 관련 각종 비리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군내 비민주화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괴문서 사건도 군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것으로 알려진 현 정부가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었다. 군내에서는 “하나회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도 장기적으로는 군 개혁에 일정한 성과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괴문서가 발견된 장소도 모두 군 관계자들의 숙소. 이번 괴문서가 발견된 곳이 육군 장교숙소 지하주차장이었다면 하나회 명단이 발견됐던 곳은 서울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였다.
그러나 이번 ‘괴문서’는 이전의 것과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서를 만든 주체. 이전의 괴문서 작성자가 개인이었다면 이번에는 여러 명이 가담한 인상이 짙다는 점이 눈길을 끌고 있다. 군사정권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는 동안 군 인사를 전후해 주로 개인차원에서 이뤄지던 투서가 최근에는 조직적인 형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동기회’와 ‘국방부 및 육군본부 대령연합회’ 명의로 된 A4용지 2장 분량의 괴문서에는 육사 34기와 35기 동기생 대표들이 진급 및 보직 관련 문제점에 대해 논의한 결과를 기록했다고 적혀 있다.
군 관련 ‘괴문서’ 사건은 이 외에도 몇 차례 있었다. 매년 인사철만 되면 약방의 감초처럼 불거졌던 것이 사실.
지난 5월에는 6월로 예정됐던 군 인사를 앞두고 ‘군을 사랑하는 모임’ 명의의 ‘괴편지’가 군 수사기관과 언론사 등에 배달돼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당시 괴편지는 이메일로 전달됐다. 이 편지에는 육군 헌병감 예산전용 등을 거론하면서 비리인사 척결과 관련자들의 진급 원천봉쇄 등을 주문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부터 군내에서는 요직에 득세했던 특정지역 출신 인맥의 청산을 요구하는 문건, 일종의 괴문서들이 은밀히 나돌았다. 올해 5월 신일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현역 대장으로서는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구속된 사건을 가져온 투서가 대표적. 이메일을 통해 청와대와 국방장관실, 법무관리관실 등에 전달된 무기명 투서에는 신 대장의 공금유용 사실이 적시돼 있었다.
군 인사와 관련한 투서 사건이 국회 국정감사장으로 옮겨져 논란을 빚은 경우도 있었다. 2002년 9월 해군본부에 대한 국회 국방위 국감에서 해군 K대령이 2000년 3월께 당시 정권 실세와 친분이 있다고 소문난 J씨에게 진급 청탁 명목으로 돈을 주고 받아 징계된 사건을 일부 야당 의원들이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당시 투서는 군내에 뿌려진 것이 아닌 정치권에 ‘제보’가 되는 형태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것과는 차이를 보였다.
지금까지 군내부에서 불거진 각종 ‘괴문서’와 ‘투서’는 대부분이 익명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군 내부에서는 “투서 작성자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내용을 적시하고 있어 비리척결에 기여하기보다는 군내 위화감을 초래하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사가 진행중인 이번 괴문서를 두고 군내에서 “어차피 밝혀지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