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 남편 백 아무개 씨는 TV 인터뷰를 통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지었다. 이날 방송을 본 사람들도 애끓는 남편의 순애보에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에 적극 뛰어들면서 사건은 전혀 딴판으로 전개됐다. 놀랍게도 처음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딸 백 씨(26)였다. 그리고 이내 그 뒤에 숨어있던 주모자가 드러났다. 범행을 꾸민 장본인은 놀랍게도 바로 TV 속에서 눈물짓던 남편 백 씨였다.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은 이렇게 패륜범죄로 밝혀지며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남편 백 씨는 왜 아내를 살해한 것일까. 또 딸은 어떻게 해서 이 범행에 함께 뛰어들게 됐던 것일까. 취재결과 남편 백 씨가 아내를 죽인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잔혹한 존속살해사건으로 마무리된 청산가리 살인 사건의 내막을 추적해봤다.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은 지난 7월 6일 오전 9시경 순천시 한 시골마을에서 풀 뽑기 작업을 하던 최 아무개 씨(59)와 이웃 한 명이 청산가리가 섞인 막걸리를 마시고 숨지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최 씨 등은 현장에서 숨지고, 함께 막걸리를 마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의성경찰서에서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지만 사건의 진척은 없었다. 7월 26일 프로파일러까지 동원됐지만 사건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실마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것은 검찰이 사건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8월 5일 딸 백 씨는 “수년간 이웃 주민에게 성폭행을 당해왔다”며 이웃주민 배 아무개 씨(50)를 광주지검 순천지청에 고발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도 함께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과정에서 백 씨가 허위로 배 씨를 고소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백 씨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지난달 24일경 검찰은 백 씨가 이웃을 무고한 이유를 취조하던 중 백 씨로부터 충격적인 증언을 듣게 된다.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자백한 것. 이틀 후 백 씨는 “아버지와 함께 범행을 꾸미고 어머니를 죽인 것”이라고 폭탄발언을 했다.
이후 검찰은 “아버지 백 씨는 아내와 잦은 불화가 있었고, 딸은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모친에게 자주 혼나자 서로 모의해 최 씨를 살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취재결과 남편 백 씨가 아내를 살해한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검찰 측의 한 관계자는 “백 씨가 최근 딸이 자신의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내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이 같은 진술은 지난달 26일 백 씨와 딸이 검찰에서 자백한 내용이라고 했다.
딸이 최근 자신의 아이까지 낳게 되자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 두려워진 백 씨는 아내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평소 작업장에 아내가 막걸리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알고 있던 백 씨는 딸에게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앞마당에 가져다 놓게 해 최 씨가 자연스럽게 술을 가지고 가서 마시도록 했던 것.
딸 백 씨가 8월 5일 이웃주민 배 아무개 씨(50)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던 것도 아버지 백 씨가 시킨 일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백 씨가 딸의 출산으로 인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무고한 이웃주민을 고소하도록 시켰다는 것.
한편 지난 2일 벌어진 현장검증에서 남편 백 씨는 범행을 재연하는 내내 장갑을 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백 씨는 이날 “막걸리는 범행 나흘 전 직접 시장에서 구입했고, 청산가리는 수년 전 해충 박멸을 위해 아는 사람에게서 얻어온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할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된 범행인 만큼 (지능이 다소 떨어지는) 딸 백 씨가 범행을 꾸몄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며 “남편 백 씨의 뜻에 따라 범행에 가담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검은색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범행을 담담히 재연한 백 씨 부녀는 “믿을 수 없다”며 분노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