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신출귀몰한 절도행각으로 세간을 발칵 뒤집어놨던 ‘대도 조세형’에 버금가는 전문 절도범이 출현했다.
9월 28일 서초경찰서는 서울 강남일대의 고급 아파트에 침입해 수십억대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김 아무개 씨(40) 등 일당 10명을 검거했다. 주범격인 김 씨는 검거된 후에도 “조세형보다 내 실력이 한 수 위”라며 경찰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경찰 조사결과 김 씨 일당은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한 고급 아파트에 침입해 다이아몬드·반지 등 90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치는 등 반년 이상 신출귀몰한 절도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지난해 9월부터 올 4월까지 총 52차례에 걸쳐 훔친 금품은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도 무려 33억여 원에 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수절도 등 전과가 있는 김 씨는 교도소에 복역하면서 알게 된 감방 동기들을 범행에 끌어들였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직접 아파트를 터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출소 후 일정한 직업 없이 도박판을 전전하던 공범들은 눈 깜짝할 사이 집안에 침입해 ‘작업’을 완료하는 그의 실력을 믿고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김 씨는 평소 공범들에게 “대도 조세형보다 내 기술이 더 낫다. 부유층 아파트는 내 개인금고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자랑하듯 하고 다녔다고 한다.
‘한몫 제대로 챙겨 폼나게 살아보자’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모인 이들 일당은 범행착수부터 완료까지 완벽을 기했다.
이들은 범행대상 선정부터가 일반 도둑들과 달랐다. 애초에 ‘돈 되는 물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집만을 범행 목표로 삼기도 했다.
이에 김 씨 등이 범행대상으로 삼은 곳은 부유층들이 다수 거주하는 압구정동과 광장동, 잠원동, 방배동 일대의 70평 이상 고급 아파트였다. 강남 일대 70평형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현금이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건질 것이 있을 것이란 게 이들의 계산이었다.
대형 평수의 아파트를 고르는 기준은 아파트 외관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평수가 큰 아파트일수록 에어컨 실외기의 수가 많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특히 이들은 최첨단 보안시설을 구비한 신축 고급 아파트 대신 지은 지 30년 이상 돼 폐쇄회로 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거나 방범이 비교적 허술한 곳만 골랐다. 경비원의 눈만 피해 단지 안으로 진입하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김 씨 일당의 수법은 아파트 비상계단의 잠금장치를 부수고 옥상에 올라가 인터넷 케이블선이나 밧줄을 타고 내려와 베란다 창문을 통해 침입하거나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평소 주민들이 잠깐 외출할 땐 베란다 문이나 창문 단속을 잘 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김 씨 일당의 범행은 가히 프로를 방불케했다. 이들은 망을 보는 사람 외에도 물색조와 침입조, 운전조, 금고해체조, 장물처분조 등으로 철저히 역할을 분담했는데 일단 물색조가 오후 시간대에 불 꺼진 집을 대상으로 빈집임을 확인하면 침입조가 침투해 범행에 착수하는 식이었다.
집안에 침입한 후에도 범행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수많은 절도범들을 상대했던 경찰을 놀라게 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이들이 집안에 침입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금고를 찾는 일이었다. 김 씨 등은 무턱대고 안방 장롱이나 서랍장 등을 뒤지는 식의 시간낭비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유층 대부분이 집안에 개인금고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노루발이나 일자 드라이버 등 금고를 부수는 장비까지 특수제작해 미리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 등이 집안에 침입하는 데는 걸린 시간은 겨우 1분. 아파트 외벽을 오르내리는 것은 마치 스파이더맨을 방불케 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 웬만한 철제 금고와 금괴를 따거나 부수는 데는 평균 30초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단단한 자물쇠로 이중 삼중으로 채워진 금고라할지라도 2분을 넘지 않았다는 게 경찰의 얘기다. 김 씨 일당이 금괴를 부수고 금괴, 보석, 현금 등을 싹쓸이하고 철수하는데 걸린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던 셈이다.
피해를 본 가구가 사설 경비업체에 등록되어 있어도 이들의 범행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업체 관계자가 출동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종료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피해자는 “경비업체로부터 도난 센서가 작동했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와보니 이미 패물이며 시계, 금붙이 등이 모조리 없어진 후였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들의 범행은 갈수록 대담해져서 심지어 한 아파트 단지에서 7가구를 줄줄이 털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면 가스배관을 타고 아파트 10층까지 올라갈 수 있고 아무리 단단한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금고라 해도 1분이면 열 수 있다”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 일당이 선호한 것은 현금 외에도 다이아몬드 같은 값나가고 희귀한 귀금속이었다. 특히 이들이 훔친 물품들 중에는 펜던트와 줄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된 목걸이는 물론 올 다이아로 세팅된 오리지널 명품시계 등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명품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에서 평균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거래되는 최고급 명품들이었다.
이들은 훔친 물건들을 장물아비와 중고시장에 시가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신속하게 처분한 뒤 나눠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보석과 귀금속의 경우 직접 세공을 하거나 일일이 분해해서 처분하는 수법으로 경찰의 추적을 피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범행으로 손에 쥔 거금을 필리핀 원정도박과 유흥비 등으로 순식간에 모두 탕진했고, 검거 당시에는 오히려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범행이 쉽게 발각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의 범행수법이 워낙 빠르고 치밀했던 탓도 있지만 피해자들이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 하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 일당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의사와 변호사, 대기업 간부, 중소기업 사장 등 고소득 전문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절도를 당하고도 소문 날 것을 우려해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는가 하면 피해 액수를 줄이는 경우도 상당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경찰의 현장조사를 꺼렸고 경찰서에 출석해 진술하는 것 자체도 귀찮아한 나머지 피해 사실을 그냥 묻어두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 일당은 부유층들의 상당수가 절도 피해를 당해도 적극적으로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노리고 더욱 과감한 범행을 저질렀다. 범인들은 분명 훔쳤다고 하는데도 피해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경우도 있고, 8억 원 상당을 훔쳤다고 자백했음에도 정작 피해자들은 1억 원으로 신고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따라서 실제 피해액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