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녀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진행했던 화재 시뮬레이션. 이 실험을 통해 남편이 화재를 지연시켜 범행시간에 혼동을 주려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 ||
2003년 2월 26일. 대법원 재판정에서는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외과의사에 대한 재상고심이 열렸다. 무죄가 확정되는 순간 적막이 감돌던 법정은 크게 술렁거렸고, 일각에서는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판정을 나서는 남자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상당히 지쳐보였다. 처자식을 죽인 ‘냉혹하고 지능적인 살인범’이라는 꼬리표는 한 젊은 의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가 세상의 오해와 편견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8년이었다.
악몽이 시작된 8년 전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지난 15년 전 ‘한국판 OJ심슨 사건’으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불광동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이다. 유죄와 무죄 사이에서 수년간 이어져온 처절한 진실게임 속으로 들어가보자.
사건은 1995년 6월 12일 오전 9시 20분경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 119소방대가 출동하면서 시작된다. 화재가 난 이 아파트 70X호는 외과의사 김형진 씨(가명·33)와 치과의사 박수인 씨(가명·31)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화재신고를 받은 소방대원이 창문을 깨고 문제의 집에 들어갔을 때 집안은 온통 연기가 가득했고, 안방에서부터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방대의 신속한 출동으로 안방 장롱 안에서 난 불은 장롱 일부와 옷들, 커튼과 벽지 일부만을 태운 후 진화됐다. 그러나 김 씨의 부인 박 씨와 딸 아영 양(가명·1)은 죽은 채로 욕실에서 발견됐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부인 박수인 씨와 딸 아영 양은 물이 가득 담긴 목욕탕 욕조에 엎드린 상태로 숨져 있었다. 박 씨는 상의가 벗겨지고 팬티가 내려져 있는 상태였는데 목에는 끈으로 졸린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목과 팔, 입술에는 반항흔으로 보이는 미세한 찰과상이 발견됐다. 아영 양 역시 특별한 외상은 없었지만 끈으로 목이 졸린 흔적이 발견됐다. 발견 당시 상태로 볼 때 이들은 뜨거운 욕조물에 몇 시간 이상 담겨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현장 감식이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타살이 분명했다. 또 화재 역시 명백한 방화였다. 따라서 수사팀은 누군가가 모녀를 살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지르고 달아난 것으로 판단했다.
부인과 딸의 살해소식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김형진 씨였다. 김 씨에 따르면 그가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7시경, 이때까지만 해도 모녀는 분명 살아있었다. 더욱이 이 날 김 씨는 자신이 개원한 병원에 첫 출근하는 날로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사건 당일 오전 7시경 부인과 딸의 배웅을 받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김 씨의 주장이었다. 남편 김 씨가 양천구에 있는 자신의 병원에 도착한 것으로 확인된 시각은 오전 8시 5분경이었다.
수사팀은 외부침입 흔적이 없는 데다가 현관문이 잠겨있었던 점 등으로 볼 때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들어갔다. 특이한 것은 집안에 없어진 귀중품이나 현금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집안을 뒤진 흔적도 없었다. 실제로 박 씨의 가방 안에서는 현금과 수표 등 50여 만 원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수사팀은 사건이 오전에 발생한 데다가 도난품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원한이나 다툼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추정했다.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은 남편 김 씨와 박 씨와 한때 정을 통한 적이 있는 인테리어 업자 A 씨였다. 하지만 A 씨는 사건 당일 오전 알리바이가 증명되어 용의선상에서 배제됐다. 결국 의혹의 시선은 남편 김 씨에게로 쏠렸다.
수사팀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현장에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단서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현장에는 범인의 지문이나 족적은 물론 머리카락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사팀은 안방 장롱에 불을 지펴 서서히 집안으로 불길이 번지게끔 만들어 범행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고의적로 늦춘 수법이나 사체를 더운 물에 담가 놓음으로써 살해 추정 시각에 혼동을 준 것으로 보아 범인이 고단수의 지능범일 것이라 추측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사건의 최대 쟁점은 모녀가 사망한 시각이 언제냐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 김 씨가 출근한 오전 7시 이전이냐, 이후냐가 관건이었다. 김 씨의 오전 7시 이후 알리바이는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모녀가 7시 이전에 살해된 것으로 규정되면 ‘출근 당시 부인과 딸이 살아있었다’는 김 씨의 진술은 거짓이 되는 셈이었다.”
수사는 점점 김 씨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갔다. 모녀의 사망시각과 관련된 부검의의 법의학 소견서가 치명적이었다. 박 씨에 대한 검안이 이뤄진 시각은 당일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당시 사체는 이미 손가락까지 경직이 온 상태였다. 국내 법의학자들은 사체의 굳은 정도(시강)나 사체에 생기는 반점(시반) 등을 고려할 때 모녀의 사망 시각은 오전 7시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즉 김 씨가 출근하기 전에 모녀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었다.
당시 수사팀은 ▲사체에 나타난 반점 및 강직상태에 대한 국과수 감정결과 ▲피해자의 소화상태 ▲거짓말탐지기반응결과 ▲딸의 우유병 및 식기 상태 ▲컴퓨터시뮬레이션을 통해 분석한 화재발생 시각이 오전 7시 이전이라는 점(방안 장롱 속 옷가지에 불을 붙일 경우 밖에서 연기를 확인하기까지 두 시간 이상 걸린다는 실험결과 도출) ▲제 3자의 침입에 따른 범행가능성 희박 등을 이유로 김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계속되는 경찰조사에서 김 씨는 강력하고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수사팀은 의혹을 풀지 않았다. 김 씨가 범인으로 몰린 이유는 또 있었다. 이는 범행동기와 직결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 수사팀이 추측한 범행동기는 가정불화였다. 수사팀은 부인 박 씨가 평소 시댁식구와 마찰이 잦았고, 김 씨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종종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수사팀은 또 김 씨가 군복무를 하던 90년대 초 부인이 인테리어 업자 A 씨와 불륜관계였던 사실 등을 알게 된 김 씨가 격분한 나머지 부인과 딸을 살해했다고 추정했다. 특히 병원 개원을 앞둔 김 씨가 자신의 누나를 사무장으로 채용하는 문제로 부인과 다툼을 벌였다는 사실도 범행동기의 하나로 거론됐다.”
이에 대해 김 씨는 강하게 항변했다. “불화가 잦았다는 수사팀의 주장과 달리 사건발생 2주 전 온 가족이 장모를 모시고 괌 여행을 다녀올 만큼 부부관계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사무장 채용 문제도 이미 다른 사람으로 결정이 난 상태였으며 부인의 불륜 사실 역시 경찰조사과정에서 처음 알게 된 것으로 그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 김 씨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김 씨는 사건발생 약 80일 후인 그해 9월 2일 살인 및 현주건조물 방화혐의로 구속되고 만다. 사건 당일 새벽 4시경 부인 박 씨와 심한 다툼 끝에 부인과 딸을 커튼용 나일론 끈으로 목졸라 살해했다는 것이 수사팀이 내린 결론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젊은 엘리트 의사가 지능적이고도 교묘하게 처와 자식을 살해한 사건으로 보도되며 국민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문제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애초부터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하고 있었다. 수사팀이 김 씨를 용의자로 지목한 근거들은 모두 간접증거 및 정황에 불과했다. 일찌감치 김 씨를 용의자로 확신한 검찰이 구속영장신청을 미뤄오다가 사건발생 2개월 20여 일 만에 김 씨를 구속한 것도 직접 증거가 전무한 것에 따른 부담감 때문이었다.
김 씨는 그해 9월 11일 변호인을 통해 구속적부심을 신청했다. 김 씨의 변호인은 “수사팀이 증거능력이 없는 거짓말 탐지기 등을 동원, 뚜렷한 증거도 없이 꿰맞추기식 수사로 김 씨를 구속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김 씨와 검찰 측은 그 해 10월 1차 공판을 시작으로 5개월간의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다. 결과는 검찰의 승리. 김 씨는 1996년 2월 23일 서울지법 서부지원 407호 법정에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가 가장 중요하게 인정한 증거는 법의학자들이 감정한 사망추정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형선고 후에도 김 씨는 강경하게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고,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변호인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 씨의 변호인은 검경이 내세운 증거의 불확실성을 증명해 내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변호인은 스위스의 저명한 법의학 교수를 법정에 세워 ‘시반과 시강으로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것은 오차 범위가 넓다. 따라서 모녀의 사망시각이 오전 7시 이후일 가능성이 있다’는 반론을 제시했다. 또 거액을 들여 실제 아파트 모형을 만들어놓고 화재실험을 진행, 불을 지른 뒤 5~6분 후 밖에서 연기를 인지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검찰이 앞서 시행한 시뮬레이션 실험결과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김 씨가 출근한 뒤 누군가 집에 침입, 범행을 저지르고 방화를 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김 씨는 그해 6월 26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극적으로 원심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로써 곧바로 김 씨가 ‘악몽’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김 씨는 1998년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판정을 받고 2001년 서울고법에서 다시 무죄를 선고받는 등 기나긴 법정투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그야말로 사형과 무죄라는 극단적인 판결을 오가면서 그는 생사의 기로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던 셈이다.
김 씨가 대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2003년 2월 26일이었다. 살인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무려 8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한국판 OJ 심슨 사건' 가족에게 또 한번 상처
김원배 연구관은 이 사건에 대해 유죄와 무죄 사이에서 수사팀과 변호인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검찰과 변호인이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한 젊고 유능한 의사의 인생이 달린 문제였죠. 어떤 사건에 대해 설령 99%의 심증이 있다해도 범행을 입증하는 단서가 없다면 범인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어요. 범인을 검거하는 것보다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수사의 기본원칙을 되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