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김씨표류기>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등장한 려원. | ||
하지만 이런 인물이 당신에게 거액의 투자를 권한다면 피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단순히 상대방의 ‘스펙’을 믿고 빠져드는 순간 평생 후회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실제 얼굴을 대한 적이 없고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는 사이라면 그 위험은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최근 12명의 투자자들이 무려 8억여 원에 이르는 돈을 한 여성에게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이 여성의 조작된 얼굴과 꾸며낸 이력을 믿고 거액을 투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의 사진을 이용해 미모의 여성으로 둔갑한 뒤 수억 원을 편취한 일명 ‘사이버꽃뱀 사기사건’ 속으로 들어가봤다.
2009년 2월 초 A 증권사 간부였던 김 아무개 씨(37)는 회사 동료로부터 40대 여성을 소개받았다. 유명 인터넷 사이트의 독신자 카페에서 알게 된 미모의 여성이라고 했다. “얼굴, 직업, 집안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퍼펙트’한 여성”이라고 소개받은 김 씨는 번호를 건네받아 그날 밤 안 아무개 씨(40)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냐”며 가볍게 시작한 대화 과정에서 안 씨는 자신의 이력을 넌지시 과시했다. “연봉 300억 원의 골드만삭스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안 씨는 “미국 페가수스 영재학교 출신으로 최연소로 MIT에 입학해 졸업 후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왔다” “고모가 한명숙 전 총리며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는 요즘도 가끔 청와대에서 식사를 한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사실은 요즘 4대강 관련 자문위원으로 정부 관련 비자금 세탁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는 등의 얘기를 늘어놨다.
김 씨는 안 씨의 말을 듣고 처음엔 ‘이 여자의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씨와 전화통화가 하루이틀 이어지면서 점차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었다. 김 씨는 경찰조사에서 “안 씨의 해박한 주식 정보와 시중에서 확인할 수 없는 얘기들을 계속해서 들으니 거의 ‘세뇌’가 되다시피해 믿음을 갖게 됐다”고 진술했다.
두 달여간 전화통화가 이어진 후 4월경 안 씨는 처음으로 김 씨에게 주식투자를 권했다. 유망한 주식이 있다며 돈을 보내면 대신 투자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전화로 들려주던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얘기 외에는 안 씨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김 씨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눈치 챈 안 씨는 김 씨에게 자신의 블로그와 미니홈피 주소를 알려줬다.
이곳에 접속한 김 씨는 ‘대문’ 사진에서 안 씨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모의 여성이 승마를 하는 모습, 가죽재킷을 걸치고 고급 소파에 앉아있는 사진 등이 블로그를 장식하고 있었다. 안 씨는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소개했다. 블로그 게시판에는 전문가 수준으로 주식시장 동향을 분석한 안 씨의 글들이 가득했다.
김 씨는 처음 안 씨의 통장으로 800여 만 원을 송금했다. 안 씨는 일주일 만에 수익금이라며 김 씨에게 100만 원을 돌려줬다. 안 씨를 더욱 신뢰하게 된 김 씨는 10여 차례에 걸쳐 총 1억 3000만 원을 송금했다.
하지만 김 씨가 안 씨에게 돈을 건넨 지 2개월이 지나자 안 씨가 투자한 주식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투자금에서 2000여만 원의 손실을 입었다. 김 씨는 잃은 돈 외에 투자금이라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안 씨는 “최소 10배로 불려주겠다. 원금은 보장해주겠다”며 김 씨의 요구를 차일피일 미뤘다.
이 과정에서 안 씨는 김 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만남을 주선했다. 5월 어느 날 안 씨의 주선으로 여의도의 한 카페에 11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대부분 교수, 공무원, 경찰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안 씨와 수차례 직접 만나 투자상담을 했다. 믿을 만한 엘리트 여성이다”라는 이들의 말에 김 씨는 다시 한 번 안 씨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주식은 계속해서 곤두박질쳤다. 이후 10월경부터는 안 씨와 연락마저 두절되고 말았다. 뒤늦게 사기임을 깨달은 김 씨는 이전 카페에서 만났던 투자자들을 찾아 나섰다. 이들 모두 안 씨와 연락이 안되는 상태였다. 알고보니 11명의 투자자들 중 안 씨를 직접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전 만남에서 김 씨에게 안 씨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이들은 한결같이 “안 씨가 자신이 MIT 출신이고 만나봤다는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이 안 씨에게 투자한 돈은 모두 8억 2600여 만 원. 김 씨와 11명의 투자자들은 지난해 11월 말 안 씨를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면서 사이버꽃뱀 사건은 수면위로 드러났다.
안 씨를 추적하던 서울 수서경찰서 강력팀은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강남구의 한 상가 건물에 위치한 안 씨의 월세방을 급습했다. 33㎡(10평형) 크기의 방은 며칠간 청소도 안한 듯 음식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안 씨는 단칸방 한편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컴퓨터로 주식시세표를 보고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안 씨가 투자자들에게 소개한 이력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내세울 만한 이력이라곤 한 외국계 투자회사에서 서무 보조일을 맡았던 것이 전부였다. 지방의 한 대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안 씨는 수년간 변변한 직업도 없이 사글셋방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안 씨가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자신이라며 소개했던 사진 역시 모두 가짜로 드러났다. 40대에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안 씨는 인터넷 쇼핑몰 광고모델 사진을 홈피와 블로그에 올려놓고 자신이라고 속여왔던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 누나 등 가족들이라고 소개한 사진들 모두 인터넷에서 나이대별로 아름다운 여성들을 찾아내 게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안 씨는 실제로는 주식에 대한 지식도 전무한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블로그에 올렸던 주식과 관련된 전문적 글들은 증권투자 기본서를 베낀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런 탓에 안 씨는 11명의 피해자들에게 건네받은 돈 8억 2600만여 원을 증권사 투자상품에 넣었다가 대부분 날린 것으로 드러났다.
안 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투자자들을 속이며 사칭했던 고위층 인물들과의 실제 친분 관계를 묻자 “이 대통령이 시장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 뒤에서 먹은 적이 있다” “한 전 총리가 갔던 곳을 가본 적은 있다”는 등 황당한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횡설수설과 달리 안 씨는 회사 사무실인 척 꾸미기 위해 투자자들과 통화할 때면 집 안에서도 하이힐을 신고 걸어다니며 통화하는 등 수개월에 걸쳐 철저하게 피해자들을 속여온 전형적인 지능범으로 드러났다.
해당사건을 수사한 수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미니홈피와 블로그 등에 올려진 가짜 사진만 보고 안 씨를 믿었다가 낭패를 본 것”이라며 “최근 농촌지역 결혼사기 사건 등 사이버상에서 가상 인물을 이용한 사기사건이 늘고 있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