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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가조작 등을 다룬 영화 <작전>의 한 장면. | ||
놀라운 것은 이번에 적발된 24명 중 12명이 모두 일가 친·인척 관계라는 사실이다. 부인과 형제, 조카는 물론 사돈의 사돈까지 합세해 벌인 간 큰 패밀리의 주가조작 사건 속으로 들어가보자.
주범인 정 씨가 주식시장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1년. 주가조작 사실이 금융당국에 적발돼 2003년 한 차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바 있는 정 씨는 그 후에도 주가조작의 달콤한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터넷 주식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익힌 지식을 기반으로 주식시장에 뛰어든 정 씨가 주가조작으로 예상외의 큰돈을 만지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2005년 2월 정 씨는 코스닥 상장회사인 직물제조업체 M 사를 대상으로 고른 뒤 ‘작전’에 들어갔다. 정 씨는 주식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는 고가매매와 통정매매 등의 수법을 동원해 시세조종 나섰다. 정 씨 일당이 주식을 사고판 횟수는 모두 873회. 2005년 4월 1일 750원이었던 M 사의 주가는 7개월 만인 11월 2일 5420원으로 6배가량 뛰었다. 당시 M 사의 주가조작을 통해 정 씨 일당이 벌어들인 돈은 26억 원이 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정 씨는 같은 수법으로 의류와 철강업체 주식에서도 각각 수십억 원씩을 챙겨왔다. 검찰조사 결과 정 씨는 2004년 6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23개 회사의 주식을 1만 7088회에 걸쳐 주가조작해 3년여 동안 250억여 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놀랍게도 이 엄청난 사기극의 이면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주가조작이 일개 개인들의 담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범 정 씨의 부인과 형제, 조카, 처남, 사돈, 인척 등 일가 친인척이 총동원되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과거 이미 주가조작으로 짭짤한 재미를 본 적이 있던 정 씨는 단기간에 목돈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게 된다. 가장 큰 한계는 정 씨 개인이 갖고 있는 기초자금이 넉넉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초기 투자금이 클수록 조가조작으로 챙길 수 있는 금액은 크기 마련이었다. 정 씨는 기초 주식 투자 자금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금이 확보됐다고 해서 주가조작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작전’ 기간 동안 철저한 비밀유지와 치밀한 담합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정 씨는 믿을 수 있고 정보공유 및 전달이 원활한 상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정 씨가 주가조작에 끌어들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형제와 가족, 친인척 등 지인들이었다. 초기비용 마련을 위해 정 씨는 끌어들인 사람들에게 이득금의 50 대 50 배분을 약속하며 투자를 받아왔다.
혈연으로 똘똘 뭉친 탓일까. 정 씨와 주가조작에 동원된 일가족과 친인척들은 그야말로 최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정 씨가 주가조작을 할 대상 기업을 정하면 나머지 형제 3명이 자금을 끌어들이고 나머지 친인척과 아르바이트생들이 정 씨의 지휘에 따라 신속정확하게 주가조작에 뛰어드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식으로 주가조작에 동원된 정 씨 일가는 정 씨의 4형제와 부인, 조카, 처남 등 무려 12명에 달했다. 또 나머지 12명도 정 씨의 친구나 지인 등 주변인물들이었다. 정 씨는 투자자금을 대면 이익을 절반씩 지급하겠다는 말로 돈을 끌어모은 것으로 드러났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의 범행이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지능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우선 금융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들은 서울과 인천, 수원, 대전, 전주, 광주 등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정 씨의 지시하에 주가를 조작해왔다. 금감원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범행의 실체에 대해서는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또 계좌추적을 피하기 위해 증권계좌를 1~3개월씩 거래한 후 바꾸는 등 총 420여 개의 차명계좌를 사용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 씨는 범행 가담자들의 신분 및 규모를 숨기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이들은 월 80만~100만 원 정도를 주고 일명 ‘클릭맨’이라 불리는 매매 아르바이트생 여러 명을 고용한 뒤 전화로 매매시기와 매매물량 등을 수시로 지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은 IP위치나 통화내역 추적이 어려운 인터넷폰이나 메신저를 이용해 매매주문을 내도록 지시하는 등 은밀하게 진행됐다.
금융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노력도 눈물겨웠다. 이들은 현금을 입출금할 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여러 금융기관에서 2000만 원 미만의 소액을 거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루 현금 거래가 2000만 원 이상이면 금융기관이 금융정보분석원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정 씨는 주로 증권거래소 및 코스닥 상장기업이면서도 적은 규모의 거래로도 주가를 움직일 수 있는 기업들을 타깃으로 삼아 대대적인 주가조작을 해왔다. 정 씨는 이런 수법으로 챙긴 거액을 이용해 사업을 확장시키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는 입시학원뿐 아니라 전국 20여 곳에 프랜차이즈식 커피전문점을 차리는 등 잘나가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정 씨는 학원 강사나 커피전문점 직원까지도 수익배분을 미끼로 주가조작에 끌어들이는 등 ‘본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단기간에 거액을 손에 쥔 정 씨의 생활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정 씨는 서울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에서 거주하며 벤츠,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등 고가의 수입차를 수시로 바꿔타고 두 자녀를 해외유학 보내는 등 초호화생활을 영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범행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금감원과 검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결국 덜미가 잡혔다. 2005년 6월부터 전국에 산발적으로 고발된 주가조작단의 범행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온 금감원은 파악된 12명을 검찰에 고발조치했다. 그리고 금감원의 자료를 토대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추가로 12명을 파악, 총 24명을 사법처리하게 됐다. 반경 수㎞ 정도로밖에 표시되지 않는 위치추적 결과를 토대로 주변을 일일이 탐문, 정 씨가 아무리 바빠도 골프 연습은 빠트리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 검찰은 지난해 12월 7일 오후 5시쯤 광진구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새로 포섭한 투자자들과 골프를 치던 정 씨를 붙잡았다. 체포 직후 검찰이 또 다른 공범들이 있는 사무실을 덮쳤을 때도 이들은 새로운 주가조작을 준비 중이었다.
검찰은 “정 씨 등이 주가조작으로 챙긴 150억 원 대부분을 타인 명의로 숨겨놨지만 부당 이득을 환수하기 위한 추적작업을 계속하겠다”며 “앞으로도 주가조작 등 금융질서를 교란시키는 금융증권범죄 사범을 엄중히 단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