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여대생 공기소총 청부살해사건 당시 현장검증 장면. 연합뉴스 | ||
사건 당일 김 씨 등은 수영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 하 씨를 납치해 검단산으로 끌고가 머리에 공기총 여섯 발을 쏴 살해한 뒤 등산로에 버렸다. 이들은 범행 직후 베트남과 홍콩 등으로 각각 도피했지만 1년 뒤 중국에서 검거됐고, 조사과정에서 1억 7000만 원을 받고 윤 씨의 살해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해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재벌가 사모님이 살인교사범으로 지목돼 사회적 충격을 던져줬던 이 사건은 주범인 윤 씨를 비롯해 조카와 공범 김 씨가 1심과 2심을 거쳐 2004년 5월 대법원에서 각각 무기징역이 확정되면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윤 씨가 조카와 김 씨를 위증죄로 고소하면서 그들만의 법정공방전이 시작됐다. 사건 발생 후 8년여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여대생 공기총 살해사건’ 전모를 되짚어 봤다.
이사건은 한마디로 불륜 의심이 빚은 비극이었다. 1999년 1월 사위가 결혼 전부터 이종사촌 동생인 하 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윤 씨는 2001년 9월부터 심부름센터 직원 20여 명을 고용해 하 씨를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미행에도 불구하고 하 씨에게서 불륜 증거를 잡아내지 못하자 윤 씨는 결국 하 씨를 납치해 자백을 받으려 했던 것으로 당시 수사 결과 드러났다.
실제로 하 씨의 가족은 2001년 4월 윤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며 같은 해 10월 윤 씨에 대해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을 해 승소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사위와 하 씨의 관계에 대한 윤 씨의 의심은 끝이 없었다. 수차례에 걸친 납치 시도가 실패하자 윤 씨는 결국 자신의 조카에게 살해하라고 직접 지시하기에 이른다.
경찰 조사결과 윤 씨의 조카는 사채업자이자 고교동창인 김 씨에게 착수금 5000만 원을 주고 납치·살해를 부탁했으며 범행 한 달여 전부터 하 씨의 집 앞에서 잠복, 동선을 확인한 뒤 범행을 실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하 씨의 가족들은 명문대 법대 재학생으로 촉망받던 딸이 끔찍하게 살해된 것도 모자라 친척 오빠와의 불륜이라는 지저분한 구설수까지 다시 오르내리자 울분을 터뜨렸다. 판사인 이종사촌 오빠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에 대해 하 씨의 아버지는 하 씨가 다니던 학교 게시판에 사건의 진상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비극은 판사인 하 씨의 이종사촌 오빠가 결혼을 전제조건으로 7억 원의 현금을 받고 중견기업 회장의 딸과 결혼을 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경찰은 하 씨가 실종된 직후부터 윤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물증이 없어 수사는 한동안 원점을 맴돌았다.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던 이 사건은 경찰이 용의자들의 석연찮은 금융거래 내역을 확인하면서부터 실마리가 잡혔다. 2001년 6월과 9월 윤 씨의 계좌에서 2억 원이 빠져나간 것과 같은해 10월 김 씨의 계좌에서 5000만 원이 인출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경찰이 심증을 굳힌 것도 이 무렵이었다.
▲ 살해교사한 중견기업 회장 부인 윤 씨. 연합뉴스 | ||
하지만 윤 씨가 “김 씨 등에게 하 씨를 살해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살해교사’라는 누명을 써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며 2005년 10월 위증혐의로 두 사람을 고소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게 된다. “이들이 마치 내 지시를 받아 하 씨를 살해한 것처럼 법정에서 허위증언했다. 나는 하 씨를 감시하고 붙잡아두라고만 지시했을 뿐”이라는 게 윤 씨의 주장이었다.
윤 씨의 조카도 대법원 상고이유서를 통해 진술을 번복해 윤 씨의 편을 들면서 소송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윤 씨의 조카는 “윤 씨의 돈을 받아 하 씨를 미행하다 납치해 살해했으며 도피자금도 받았다”는 기존 진술을 뒤집고 “윤 씨의 살해교사 부분은 위증이며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다가 엉겁결에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의 핵심은 과연 윤 씨의 살인교사가 있었느냐였다. 이들이 살인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을 번복하게 된 배경과 과정 등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검찰은 2007년 1월 18일 공소심의위원회를 열고 이들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윤 씨가 낸 재정신청이 2008년 7월 대전고법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재판은 다시 진행됐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된 범인들이 사건의 핵심 고리인 살인교사 진술을 번복한 데 이어 윤 씨가 김 씨 등을 위증 혐의로 고소하고 법원의 재정신청 인용으로 열린 위증사건 공판에서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검찰은 윤 씨가 살인교사 혐의를 벗기 위해 공범들의 위증을 주장하고 나선 데 이어 공범들이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번복해 돌연 윤 씨의 무혐의를 주장한 배경에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특히 윤 씨 조카와 김 씨가 이미 무기징역이 확정된 상태에서 위증죄가 추가된다 해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에 따라 윤 씨를 돕기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청주지법 형사합의 11부도 2월 18일 윤 씨가 위증혐의로 고소한 조카와 김 씨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이 윤 씨의 살해지시를 인정한 셈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고소인과 피고인은 살해지시가 없었으며 공기총 오발사고였다고 진술을 번복하고 있으나 살해지시가 있었다는 종전 진술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이전 재판에서 확인됐고, 살인을 지시받았다고 진술하면 형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경찰 회유로 시나리오를 구성해 진술했다는 점도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윤 씨가 미행만을 지시했다고 하기에는 많은 금액을 준 점, 지시한 내용이 구체적인 점, 피고인들이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없다는 점, 피고인들이 진술을 번복한 시점이 형이 확정된 이후로 피고인들에게 특별한 불이익이 없고 오히려 이익이 있을 것으로 더 보여지는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인들이 번복한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살인을 교사했다는 시점은 남편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사위의 불륜을 신경 쓸 여지가 적었다”는 윤 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당시 피고인에게 큰 금액을 지급했고 남편이 법정구속된 이후 피고인과 290여 차례에 걸쳐 전화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윤 씨의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김 씨와 조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에 따라 살인교사 혐의가 인정된 윤 씨는 재심청구가 불가능해져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대법원에서 확정된 무기징역형을 복역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