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지주가 차기 최고경영자(CEO) 선임시 현직 회장에게 우선권을 주는 승계 프로그램 도입에 대한 결정을 보류했다. 왼쪽은 윤종규 회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지난 2월 27일 열린 KB금융 이사회에서는 때 아닌 격론이 벌어졌다. 당초 이날 이사회는 KB금융을 격랑 속에 빠지게 했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었다.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지배구조 개선안’은 마련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이견이 없으면 개선안 발표가 있을 것으로 예고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KB금융 이사회는 이날 회의에서 개선안 승인을 전격 보류했다. ‘CEO 승계 프로그램’을 두고 예상치 못한 의견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사회가 끝난 뒤 무거운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서던 김영진 사외이사는 당시 “현직 CEO에게 연임 우선권을 주는 것에 관해 논란이 있어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이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CEO 승계 프로그램’과 ‘연임 우선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KB금융을 다시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일까.
CEO 승계 프로그램은 쉽게 말해 현직 CEO가 물러날 때 내부인사가 차기 CEO 자리를 이어받는 방식을 제도화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씨티그룹이나 JP모간 등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CEO가 바뀌더라도 기존의 경영방식을 이어갈 수 있고 조직을 안정시키는 등의 장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연임 우선권은 CEO의 임기가 끝나더라도 본인이 원하면 연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그동안 외풍에 시달리며 CEO가 흔들리는 문제를 겪어온 KB금융이 짜낸 고육지책이다.
시각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지만 KB금융의 현 상황을 감안하면 큰 무리는 없어 보이는 이 두 제도가 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언제부터 이 제도를 적용하느냐’를 놓고 이사회의 견해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연임 우선권을 현직인 윤종규 회장부터 적용하느냐 여부다. 당초 KB금융지주는 외부 컨설팅을 통해 마련한 지배구조 개선안을 바탕으로 윤 회장부터 연임 우선권을 주는 내용의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오면서 ‘보이지 않는 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융권이 의심하는 가장 강력한 외부 입김은 금융당국이다. 금융당국은 연임 우선권이 장기집권과 이에 따른 내부 권력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금융당국 관계자는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지난번(KB 사태)처럼 엉망을 만들어도 연임하겠다고 하면 시켜준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경영성과나 실적을 평가한 뒤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게 순리”라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권은 금융당국의 이런 시각에 대해 ‘관치금융을 연장하려는 시도’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민간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이런 시각이 여러 경로를 통해 KB금융에 전해진 것으로 안다”면서 “당국이 여전히 KB금융에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이라고 귀띔했다.
논란이 일자 당사자인 윤종규 회장은 “연임 우선권은 차기 회장부터 적용해달라”고 스스로 요청하며 한발 물러섰다. KB금융은 결국 이사회를 목전에 두고 차기 회장부터 CEO 승계 프로그램과 연임 우선권을 부여하는 수정안을 만들어 안건으로 상정했다.
2월 27일 KB금융 이사회의 때 아닌 격론은 이런 과정에서 일어났다. 사외이사들이 당초 보고받은 지배구조 개선안과 다른 내용의 수정안이 올라오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날 이사회는 연임 우선권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3월 열릴 회의로 결정을 미뤘다.
한편 KB금융 이사회는 연임 우선권과는 별도로 이미 윤종규 회장의 연임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또 다른 제도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파악된다. CEO 자격과 관련해 나이제한을 두는 규정을 추진키로 한 것. 금융권에 따르면 KB금융 이사회는 최근 별도의 회동을 갖고 최고경영자의 연령을 제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KB금융 이사회가 논의한 연령제한 규정에 적용할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윤종규 회장의 나이가 올해 60세이고, 임기가 3년임을 감안할 때 이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이 방안 역시 재소집되는 이사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상정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연임 우선권 적용이 차기 CEO부터로 결정되고 연령제한규정까지 신설된다면 윤종규 회장으로서는 연임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신창이가 된 국내 최대 KB금융그룹을 맡은 지 100일여 만에 ‘미래권력’을 이사회에 맡기게 된 윤종규 회장이 뜻밖의 파고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주목된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