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위즈파크’는 kt라는 기업의 색을 살리기 위해 첨단 IT 기술을 접목해 ‘스마트 야구장’을 구현했다. 사진출처=수원시
수원구장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현대의 마지막 홈구장이었다. 1989년 수원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를 위해 새 야구장을 완공한 게 출발점이었다. 처음에는 인천·경기 지역을 연고로 한 태평양이 제2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현재 삼성의 포항구장이나 롯데의 울산 문수야구장과 같은 개념. 한 해에 6경기에서 많으면 9경기까지 열리곤 했다. 그러나 1994년 수원에도 야구 붐이 불기 시작했다. 태평양이 홈경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1경기를 수원에서 열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이 그해 창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기에 인기는 더 높아졌다.
현대가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해 재창단한 뒤 수원구장은 다시 제2구장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갔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변화가 생겼다. 신생팀 SK가 인천을 연고로 창단하면서 현대가 “우리는 서울로 가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 서울에는 쓸 구장이 없으니, 당분간 ‘잠정 무연고’ 상태로 수원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겠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SK는 ‘인천의 팀’이 됐고, 연고팀을 잃은 수원의 민심은 급격하게 돌아섰다. 수원의 야구팬들은 “현대는 수원구장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을 뿐, 곧 우리를 버리고 서울로 떠날 팀”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현대는 수원을 메인 구장으로 쓴 첫 해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관중석은 늘 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스타군단으로 군림하던 현대가 순식간에 비인기 구단으로 변했다. 팀도 팬들도 마음이 떠났으니 야구장 상태도 점점 안 좋아졌다. 당시 선수로 뛰었던 A 야구인은 “처음에는 아주 질 좋은 잔디가 깔려 있었지만, 나중에는 많이 빛이 바랬고 군데군데 많이 빠지기도 해서 황량해 보였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배수시설이 좋지 않아 비가 조금만 와도 쉽게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고 기억했다. 현역 B 선수도 “처음 프로에 들어와서 수원구장에서 경기를 할 때 야구장에 관중이 많이 없었던 게 가장 기억이 난다”며 “조용할 때는 타석에서 팬들의 얘기가 너무 잘 들리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현대와 함께 휴면한 수원구장
설상가상으로 당시 철옹성 같았던 현대그룹의 재정 상태가 안 좋아졌다. 서울에 새 야구장을 짓기가 힘들어졌다. SK에 인천 연고를 내주는 대가로 받았던 보상금을 LG와 두산에 서울 입성 비용으로 지불하기로 했지만, 결국 그 돈조차 구단 운영 자금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서울로 갈 수도 없고 수원을 떠날 수도 없는 신세. 그렇게 가세가 기울어가던 현대는 끝내 야구단 운영을 포기했다. 수원구장도 함께 잠이 들어야 했다.
1만 4465석 규모였던 신축 전 수원 구장. 현재 2만 255석으로 증축했다.
2007년 10월 5일. 현대와 수원구장의 고별전이 열렸다. 2006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던 현대는 마지막 시즌을 정규시즌 6위로 마쳤다. 다행히 한화와의 최종전에서는 2-0으로 이겼다. 현대 최후의 사령탑이던 김시진 감독은 방송 인터뷰 도중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다 말문이 막혔다. 홀로 불 꺼진 감독실에 들어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팬들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수원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달려들어 왔다. 김 감독과 선수들에게 사인을 요청하며 함께 울었다. 이날 수원구장의 관중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1444명.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쓸쓸하게 떠나는 현대의 12년 역사에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수원구장에서는 2008년부터 프로야구 대신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를 비롯한 아마야구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2011년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시행된 이후에는 경기도 지역 고교 팀들의 주말리그 구장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프로야구에 대한 수원의 갈증은 여전했다. 치열한 승부로 야구장이 들썩거리던 그 순간을 숨죽여 기다려왔다.
#마법사 kt의 새 요람이 되다
프로야구단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을 이미 확보한 수원은 새 구단이 창단할 때마다 늘 연고 후보지역 1순위로 꼽혔다. 수원시도 적극적이었다. 2013년 1월 제10구단 kt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당장 수원구장을 2만 3000석 규모로 증축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결국 kt의 선택은 수원이었다. kt는 수원시와 계약하면서 25년간 무상으로 수원구장을 사용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야구장 이름도 ‘위즈파크’라고 지었다. 그리고 수원시와 함께 곧바로 야구장 리모델링에 돌입했다. 일단 기존에 1만 4465석이었던 경기장을 2만 255석으로 증축했다. 올 시즌이 끝나면 추가 증축을 시작해서 내년 말까지는 약속대로 2만 3000석 규모의 야구장을 완성하겠다는 포부다. 그라운드는 잠실구장 다음으로 넓어졌다. 홈 플레이트에서 좌우 펜스까지 98m, 중앙 펜스까지 120m다.
지난해를 2군에서 보낸 kt는 올해 마침내 대망의 1군 무대에 입성한다. 3월 14일 두산과의 시범경기 개막전에 맞춰 성대한 개장식을 열었다. 선수들을 위한 시설은 당연히 최신식. 관중들에게도 최고의 야구장이다. kt라는 기업의 색을 살리기 위해 ‘스마트 야구장’을 구현했다. 구단 공식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인 ‘위잽(Wizzap)’은 야구장의 각종 시설과 거미줄처럼 연계돼 있다. 좌석도 알아서 찾아 주고, 먹을거리를 살 때도 줄을 서지 않고 앱을 통해 바로 주문하면 된다. 새롭게 설치된 가로 27.84m, 세로 8.88m의 전광판은 풀 HD 스크린으로 무장했다. 초대형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듯한 화질로 다양한 영상 서비스를 제공한다. 수원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먹을거리 브랜드들도 입점했다. 경기장 외야에는 스포츠펍까지 들어왔다.
8년 만에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단장하고 돌아온 kt 위즈파크. 3월 31일 열리는 삼성과의 홈 개막전에서 공식적인 첫 발을 내딛는다. 과연 앞으로 어떤 선수들이 수원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까. 야구계가 새로운 활력으로 들썩거리고 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원년 구장들 추억 동대문 - 이종도 ‘만루탄’, 인천 도원 - 장명부 ‘마구’ 2013년 10월 4일. 역사적인 야구장 하나가 프로야구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전신 해태부터 현재의 KIA까지 타이거즈의 심장 역할을 했던 광주구장(무등경기장 야구장)이다. 1965년 제46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광주 북구 임동 316번지에 건설된 광주구장은 넥센과의 정규시즌 최종전을 마지막으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32년간 지켜온 타이거즈의 홈구장 타이틀을 바로 옆에 신축된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 넘겨줬다. 대구구장과 함께 늘 가장 낙후된 야구장이라는 오명을 달아야 했던 광주구장. 그러나 타이거즈의 오랜 팬들에게는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더없이 소중한 장소였다. 원년부터 사용 중인 대전구장(위), 아래 왼쪽부터 철거된 동대문운동장과 도원구장,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 홈구장 자리를 내준 광주경기장.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일요신문 DB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6개 구단으로 출범했다. 서울을 연고로 한 MBC는 서울 동대문구장, 삼미는 인천 도원구장(숭의 야구장), OB(현 두산)는 대전구장(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해태(현 KIA)는 광주구장, 삼성은 대구구장(시민운동장 야구장), 롯데는 부산 구덕구장(구덕공설운동장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했다. 그 가운데 동대문구장과 도원구장, 구덕구장은 광주구장보다 먼저 프로야구 역사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동대문구장과 도원구장은 야구장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동대문구장은 1982년 3월 27일 삼성과 MBC의 원년 개막전이 열린 장소. 프로야구 출범 전부터 이미 한국 야구의 메카였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지방 구단들이 동대문구장에서 팬 서비스 차원의 홈경기를 치르기도 했을 정도다. MBC가 1982년 7월 개장한 잠실구장으로 옮긴 뒤에는 대전을 연고로 하던 OB가 1985년 서울로 이전해 1년간 동대문구장을 홈구장으로 썼다. 그러나 OB가 1986년부터 MBC와 함께 잠실에 둥지를 틀면서 동대문구장은 아마추어 전용구장으로 사용됐다. 그 후로도 한동안 고교야구의 요람으로 통했지만, 2007년 끝내 철거됐다. 도원구장은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지는 인천 연고팀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곳이다. 홈 플레이트부터 외야 좌우 펜스까지 91m, 가운데 펜스까지 110m로 프로야구장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곳이기도 했다. 2000년 창단한 SK가 현대로부터 도원구장을 물려받았지만, 2002년 문학구장이 개장하면서 쓸쓸히 뒤로 밀려났다. 도원구장은 2008년 철거됐고, 현재 그 자리에는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구덕구장은 롯데가 1985년까지 안방으로 사용했던 경기장이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올스타전(1982년 7월 1일 올스타 1차전)을 개최했고, 사상 최초의 사이클링히트(1982년 6월 12일 삼성 오대석)도 나왔다. 2007년에 인조잔디를 심기 전까지는 내야는 물론 외야에도 흙만 깔려 있었던 게 특징이다. 롯데가 1986년 사직구장으로 옮겨 가면서 아마야구 전용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 말에는 또 하나의 야구장이 앞선 네 구장의 뒤를 이어 프로야구와 이별한다. 삼성이 올 시즌을 끝으로 대구구장(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을 떠나 신축 구장으로 이전한다. 내년부터는 대전구장이 유일한 프로야구 원년 구장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프로 원년 OB의 홈이었던 대전구장은 1986년부터 빙그레(현 한화)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은] |
선수들 ‘수원구장의 추억’ 장원삼첫승 거둔 이곳서 100승 노린다 삼성 투수 장원삼에게 수원은 무척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2006년 현대의 대졸 신인으로 데뷔한 장원삼은 그해 4월 16일 수원 KIA전에서 8이닝 무실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데뷔 첫 승을 따냈다. 바로 그 수원구장 마운드에 8년 만에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장원삼.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스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이택근. 삼성 외야수 박한이는 수원과 대구, 잠실을 오가며 현대와 9차전까지 혈투를 벌였던 2004년 한국시리즈 멤버다. 그는 “2차전에선가 수원에서 홈런(4-8로 뒤진 6회 추격의 2점홈런)을 쳤다. 현대와 폭우 속에서 맞붙었던 9차전도 잊을 수 없다”며 웃었다. 롯데 출신인 KBS N스포츠 조성환 해설위원은 “데뷔 후 처음 3할 타율을 쳤던 2003년에 수원에서 현대와 개막 2연전을 했는데, 두 번째 경기에서 홈런을 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한 덕분이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물론 앞으로는 kt 소속 선수들이 수원구장이 아닌 ‘위즈파크’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kt에서 새 출발하는 베테랑 장성호는 “수원 구장 마지막 해에 6타수 6안타를 쳐서 내게는 기억이 좋은 장소”라며 “리모델링을 정말 잘 해놓아서 잔디를 밟기 아까울 정도다. 가뜩이나 홈런도 못 치는데 외야 펜스도 높아졌으니, 똑딱똑딱 짧게 끊어 쳐야겠다”고 농담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