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작가들은 말 그대로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경험해볼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 그런 만큼 갖가지 직업의 특성과 성격, 그리고 에피소드를 극중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여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보통 작가들이 특정 직업을 조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몇 차례의 인터뷰나 자료조사만으로 끝내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인터뷰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제 체험까지 하는 경우다.
▲ 영화 <와일드 카드>의 한 장면. 이 영화의 이만 희 작가는 3년 동안이나 형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내공’을 쌓았다. | ||
또 드라마는 직업 그 자체의 에피소드보다는 전반적인 분위기만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업적 구체성이 다소 떨어져도 어느 정도 용인된다.
반면 영화에 등장하는 직업은 나름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영화적 재미’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해당 직업 소유자만이 느끼는 애환과 즐거움, 에피소드가 충분히 녹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품행제로>의 임은경이 주연으로 캐스팅돼 현재 촬영중인 영화 <도마뱀>은 ‘빚을 받으러 다니는 젊은이들’을 다루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사채업자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리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
특히 제작진은 사채업자들이 자살을 해도 보험금이 지급되는 점을 악용해 채무자에게 보험 가입과 자살을 강요하는 부분을 여과 없이 보여줄 예정이다. 이는 실제 현실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여서 제작진은 현실 비판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낼 계획이다.
감독과 제작진이 이러한 구상을 하기까지는 주변의 ‘사채업자 지인’ 덕이 컸다고 한다. 사채업에 몸을 담고 있는 아는 사람을 통해서 ‘그쪽 세계’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와 함께 업자들의 수법을 모두 전수(?) 받았다는 것.
실제로 제작진은 사채업자임을 위장해 ‘진짜’ 업자들과 빚을 받으러 다니는 현장에 동행, ‘협박과 엄포’가 오가는 살벌한 순간들을 체험했다고 한다. 비록 영화제작을 위해서 동행한 것이긴 하지만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사채업자들의 ‘악덕성’을 더욱 실감하기도 했다고.
올해 5월에 개봉돼 1백만 명이 넘는 관객을 기록했던 영화 <와일드 카드>의 경우 집필 작가의 철저한 취재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이만희 작가는 무려 3년이라는 기간을 취재와 실제 체험에 투자했다. ‘퍽치기’라는 소재를 잡는 데만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그간 만났던 형사만 1백 명, 탐독했던 수사전문잡지는 수십 박스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새벽예배를 보러 가는 노인이 든 성경 가방을 돈가방으로 착각해 살해한 사건을 실감나게 그려냈고, 동료와 함께 칼을 맞을 때 ‘칼을 나눠 먹는다’라는 리얼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작가는 취재 당시 형사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고 퍽치기 검거 현장에도 가는 등 말 그대로 ‘반(半)형사’가 되었다고 한다. 영화 <와일드 카드>가 유난히 형사들의 세계를 잘 그렸다는 평을 받는 것도 모두 이 같은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가는 요즘도 언론의 사건 기사를 보면 형사들의 수사기법을 대략 예상하기도 한다고.
<살인의 추억>으로 최고의 스타 연기자로 발돋움한 송강호의 차기작 <효자동 이발사>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이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이발사는 없다. 다만 특정 이발사가 정기적으로 대통령의 머리를 다듬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 속의 직업은 ‘반은 허구, 반은 실제’라고 볼 수 있다.
<효자동 이발사>의 대본을 집필한 임찬상 감독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직업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특히 시대적 배경이 70∼80년대인 점을 감안해 임 감독은 종로, 청계천 등지의 오래된 이발소를 찾아다니며 머리를 많이 깎았다고. 그러다 보니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자꾸 다듬게 돼 한동안 스포츠형 머리로 지내야 했다고 한다.
영화는 일종의 ‘훔쳐보기’이자 ‘대리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극의 전개를 통해 직업의 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 가는 것은 쏠쏠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현실의 작은 에피소드가 풍부한 영화적 리얼리티로 되살아나 관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기까지 작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배어 있는 셈이다.
이남훈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