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예능 등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작가, 조연출, 단역 배우들은 ‘을 중의 을’로 꼽힌다. 사진들은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위)와 <부자의 탄생>의 촬영 모습.
그동안 방송가의 갑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유명한 작가가 최고의 권력자다. 그들의 행보에 따라 지상파 방송사의 편성이 바뀌고 캐스팅이 널을 뛴다. 방송사에 몸담고 있는 본사 PD와 내로라하는 스타들도 갑 중의 갑이다. 예능 제작 현장에서는 PD와 메인 MC의 목소리가 단연 크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돌려 생각해보자. 방송가에서 ‘을 중의 을’은 누구일까. 일단 예능이나 드라마의 막내 작가를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 집단은 비정규직이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고정된 월급이 없다. 일이 있을 때면 돈을 벌지만, 재난 상황이나 국가대표 축구 A매치 특집 방송 등으로 결방되면 한 주 치 급여가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프리랜서니 일을 여러 개 잡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막내 작가에게 ‘더블 잡(job)’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의 적은 급여와 불안정한 고용보다 더욱 가혹한 건 제작 환경이다.
막내 작가들은 현장에서 주로 “막내야”라고 불린다.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갑들은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 작가니 글을 쓰는 게 본업이라 생각하지만 막내 작가는 그보다는 잔심부름을 주로 한다. 대본 리딩 때면 간식거리를 챙기고 출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스케줄을 정리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녹화가 끝난 후에는 출연자들이 놓고 간 대본을 일일이 수거하고 현장을 꼼꼼히 챙기는 것도 그들의 몫일 때가 많다.
그들은 그야말로 ‘열정 페이’ 수준의 돈을 받고 일한다. 24시간 항상 대기 상태고 개인 생활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일을 한다. 메인 작가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한 예능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로 일하고 있는 A는 “메인 작가가 되면 여러 일을 동시에 맡을 수도 있고 지상파 PD와도 어깨를 견줄 만큼 파워가 생긴다. 기획에 더 신경 쓰고 큰 줄기만 잡으면 서브 작가들이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을 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다”며 “메인 작가가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좋아하는 방송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고 전했다.
예능국 조연출의 업무 강도도 업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촬영 준비부터 본 촬영, 촬영 후 수십 개의 녹화 테이프를 체크하고 편집 후 자막을 붙이는 일까지 산더미 같은 업무와 매주 마주한다.
포맷에 따라 업무량은 크게 차이난다. 실내에서 녹화하는 스튜디오물의 경우 그나마 챙겨야 할 테이프가 적지만, 야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경우 각 출연진마다 VJ가 따로 붙고 1박2일간 촬영하는 프로그램은 출연진 1명 분량 녹화 테이프가 10개가 넘을 때가 부지기수다. 이를 일일이 보고 촌철살인 자막까지 쓰려면 잘 시간조차 부족하다.
유명 예능프로그램의 조연출을 맡고 있는 B는 “집보다 편집실에서 자는 일이 더 많다. 편집실에서 속옷부터 양말까지 다 갖다 놓고 방송국 화장실에서 씻는다”며 “잠깐 짬을 내 근처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그나마 호사”라고 말했다.
게다가 수많은 조연출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조연출의 경우 몇 해가 지나면 자신의 프로그램을 론칭하며 일명 ‘입봉’을 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 조연출의 경우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나이를 먹는 경우가 많다. 운이 좋아 경력 PD로 정규직 PD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니 고용 형태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도 클 수밖에 없다.
쪽대본이 난무하는 드라마 제작 환경은 방송사 업무 중 가장 일이 힘든 곳이다. “대기하는 것이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냥 현장을 지켜야 할 때가 많다. 그러다 대본이 오면 몰아치듯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쪽잠을 자기 일쑤다. 배우들의 경우 자기 출연 분량이 없을 때는 매니저가 대기시켜놓은 차량 안에서 휴식을 청할 수 있지만 스태프들은 모든 촬영을 준비하고 이끌어가야 한다. 당연히 연차가 낮은 조연출이나 FD에게 많은 일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배우들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분명하다. 연차도 중요하지만 인기도가 우선이다. 인기가 많으면 비중이 큰 역할을 맡고 그만큼 대우도 받는다. 반면 신인들은 툭하면 자신의 녹화 순서가 밀려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지 않은 건 단역 배우들이다. 이들은 정해진 배역이 없이 각 장면마다 필요에 따라 투입된다. 때문에 마냥 대기하는 것이 일이다. 마땅히 대기할 장소가 없어 한겨울에도 밖이나 좁은 대기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견뎌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함부로 불만을 토할 수도 없다. 그들을 관리하는 ‘반장’의 눈 밖에 나면 출연 기회가 아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장에게 잘 보여 배역을 따내고 일당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하는 것이다.
한 드라마 외주 제작사 관계자는 “방송사는 TV 뉴스를 통해 수시로 비정규직 문제와 그들의 애환을 다루지만 정작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쓰고, 노동 환경이 척박한 곳이 방송국”이라며 “드라마, 예능 등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숱한 비정규직 작가, 조연출, 단역 배우 등은 갑을 관계의 말단에서 버둥대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