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의 전설> 이성재와 박솔미. | ||
첫 발을 내딛자마자 ‘슈웅’하고 바람이 분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바람 한점 없는 청명한 봄날이었다. 대신, 다른 게 있었다.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손바닥에서 연신 땀이 배어나왔다. “이렇게 제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세요.” 여자 몸에 생전 처음 손을 대 본 것도 아닌데 온 몸에서 마찰음과 파찰음이 웅웅거린다. 촌스럽게시리. 이제 춤바람이 나는 건 시간문제다. 뭐, 춤바람만이겠나. 하지만 그때 그녀의 교태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춤 잘 추실 것 같은데, 이번에 등록하시죠?” 깬다.
춤선생인 그녀도 어쩌면 본능적인 꽃뱀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원래 춤이란 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애의 동작에서 시작됐다지 않던가.
댄스 학원 등록쯤은 그래도 애교 수준이다. 역시 많은 영화들이 춤을 이처럼, 욕망을 배출하고 욕망을 요구하는 구애의 몸부림으로 그렸다. 힙합 댄스를 소재로 한 영화 <허니>에서 여주인공 제시카 알버는 댄스 스타로서 성공하기 위해 여러 남자 사이를 오가며 출세욕을 불태운다. 그래서 영화 속 힙합은 출세의 욕망에 집착하는 자의 춤이다. 댄스 영화의 전설 <플래시 댄스>는 어떤가. <플래시 댄스>의 춤에는 공장 일용직 노동자인 여주인공이 보여주는 신분 상승의 열망이 담겨있다.
사랑을 불사르는 막무가내 춤도 있다. <더티 댄싱 : 하바나 나이트>를 보면, 쿠바 혁명의 와중에도 남녀 주인공이 몰두하는 것은 오직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살사다. 원조 <더티 댄싱>에서도 역시 신분과 성격 차이를 몸부림만으로 극복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어떤 춤에는 세속적인 욕망 이상의 무엇이 배어나기도 한다.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에게 탱고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생의 불꽃 같은 몸부림이다. <쉘 위 댄스>에서 40대 샐러리맨인 주인공 스기야마는 춤을 통해 자신이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다른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원래 몸치에 박자치였던 이성재는 <바람의 전설>을 찍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오죽하면 그를 가르친 춤선생이 감독에게 ‘주연배우 교체’를 요구했을까. 하지만 어떠한 구박 속에서도 이성재는 포기하기 않았다. 이성재란 사람이 원래 그렇다. 하염없이 성실하고 또 하염없이 노력한다.
<바람의 전설>에서 그려진 박풍식의 춤 역시 이성재의 노력처럼 한결 같은 구도의 길이다. 욕망의 배출구가 아니라 순수하게 좋고 미칠 것처럼 애가 타서 춤을 춘다. 어쩌면 그래서 <바람의 전설>의 박풍식에게는 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래서 어떤 자에게는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일 테고 말이다.
지형태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