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지난 3월 1일, 제96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박 회장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과정에서 “백용성이, 이승훈이, 이갑성이, 박준승”이라며 ‘민족대표33인’을 낮춰 불러 유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비대위 측은 박 회장이 3·1절 행사 후 광복회 지부장들과 함께 영등포 인근 노래방을 찾아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비대위 측은 “박 회장은 평소 직원들 앞에서 생존해 계신 독립유공자들을 상대로 ‘○○○이 왔어? ‘○○○이도 왔어? ‘○○○은 왜 왔어?’ 등 상식 이하의 언사를 일삼았다”고 덧붙였다. 비대위의 한 관계자는 “광복회장이 3·1절에 그와 같은 망동을 한 것은 현충일날 군 장성들이 술파티를 벌인 것과 진배없다”고 쏘아붙였다.
박 회장은 당시 발언이 논란이 일자 해명자료를 통해 “유족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면서 “중간 중간 호흡조정을 하거나 부드럽게 호명하려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3·1절에 노래방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비대위 측 주장에 대해서도 “행사 후 지부장들을 만나지도, 노래방에 간 사실은 더더구나 없다”고 강력 부인하며 “이를 문제 삼아 제가 광복회장으로서 자질이 부족해 퇴진하라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했다.
여의도에 위치한 광복회관 건물. 박유철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눈에 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하지만 유족회 측은 박 회장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정유헌 민족대표33인유족회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박 회장이 농성장을 방문했을 당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라고 말하거나, 고개를 까닥 숙이며 ‘이렇게 하면 되느냐’ ‘역사학자를 불러 따져봐야겠다’는 식으로 일관했다”며 “사과하러 들른 날이 24일이었는데 전날(23일) 항의에 나선 유족들을 상대로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하고 이후 접근금지 신청을 내기도 했다. 절대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비대위 측에 선 한 광복회원은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집안 재산 다 털어서 오직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 아닌가.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가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박유철 회장은) 이런 이들을 지원하기는커녕 일부 회원들을 상대로 고가의 식사 대접이나 연예인을 불러 초호화 행사를 여는 등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갖고 행동한다”라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비대위 측은 박 회장이 현 정권 들어 논란이 된 새누리당 건국절 제정 문제, 이인호 KBS 이사장의 백범 선생 폄하 발언,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반역사적 발언에 관해 “야당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입장을 밝히기를 주저하는 등 광복회장으로서 직무를 소홀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광복회 측은 “광복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 원칙에 따라 문제를 처리했다”라고 반박했다.
광복회 선거를 앞두고 또 다른 쟁점은 회관 신축 문제다. 1977년에 건립된 광복회관은 지난 2009년 40억 원을 들여 리모델링한 이후 6년 만에 다시 450억 원을 들여 신축이 예정돼 있다. 광복회 측은 “광복회관 신축은 박유철 회장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다. 신축으로 임대 수익이 증가하면 장기적으로 독립유공자 유족과 후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서 “국회에서 이미 다 결정된 부분이고 지난 총회에서도 압도적인 찬성으로 결정된 만큼 되돌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비대위측 정유헌 민족대표33인유족회장(왼쪽)과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이 박 회장의 퇴진을 주장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하지만 이 같은 이야기에도 허점이 있다. 회관 신축을 위한 예산 450억 원은 다름 아닌 친일파환수재산으로 조성돼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들의 복지 사업에 쓰여야 하는 ‘순국선열 애국지사 기금’이라는 점과 신축 이후 광복회 단독명의가 아닌 국가보훈처와 공동명의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대위 측은 “신축에 관한 의견은 회원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나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보훈처와 공동운영하는 부분은 대부분 반대하고 있다. 신축 추진 당시 박 회장 쪽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광복회 측은 “신축 이후 보훈처와의 지분관계 등은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 회장은 독립유공자가 아닌 그 유족으로는 최초로 광복회장을 맡은 인물로 25대 보훈처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회장 재신임에 도전하는 것도 최초의 일로, 광복회 안에서는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 마땅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선거가 끝나면 갈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앞서의 정유헌 회장은 “처음부터 선거와 관계없이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장 한 사람으로 인해 광복회가 얼마나 불행해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이를 묵과하는 것은 역사 앞에 큰 죄를 짓는 일”이라며 “항의에 나선 유족 가운데 직접 회장 선거에 나가려는 사람도 없다”고 덧붙였다.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 역시 “광복회는 지난날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그 가족들에게는 본부와도 같은 곳”이라며 “광복회는 정부로부터 상당한 지원금을 받으며 엄연히 나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회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독립정신을 철저히 계승해야 할 광복회장이 최초 공약했던 것을 지키기는커녕 전횡을 일삼아 사분오열되는 것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